합천 해인사에 내걸린 이 글귀가 나를 붙잡았다···”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사진 다음 블로그>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 주련(柱聯)에 이런 글이 있다.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圓覺度量何處 現今生死卽時)

뜻은 ‘깨달음의 도량 즉 행복한 세상은 어디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이곳, 당신이 발 딛고 있는 이곳이다’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 하라”는 뜻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맞은 편 기둥에 새겨져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할 수 있지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라는 말 아닌가? 평생 일만 하고 사는 바보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지금’(present)이다.

중국인들이 애용하는 상용구(常用句)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昨天的太阳晒不干今天的衣裳 今晚的月光照不亮昨晚的身影”(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마라.”

어제의 태양으로 오늘의 옷을 말릴 수 없고, 오늘 밤 달빛으로 어젯밤 그림자를 비출 수 없다.

마음공부의 대가인 원불교 금산(錦山) 권도갑(權道甲) 교무의 글 중에 ‘지금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를 소개한다.

나는 평생 지금을 살고 있다. 지금은 시간이 없고(無時), 장소가 따로 없으며(無處), 모든 존재의 바탕이고 근원이다. 지금은 내 영혼의 고향이며 영원하고 변함없는 안식처다. 진리는 온통 지금 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서 언젠가 부처가 되려 하고 있다.

지금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광대 무량한 천국이요 낙원이다. 이를 따로 만들려 애쓰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몸은 지금에 있으면서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은가? 분별을 내려놓는다면 지금의 나와 우리가 이미 부처요. 여기가 영원한 불국토(佛國土)다.

합천 해인사 <사진 다음 블로그>

다만 비교와 차별을 내려놓고 지금(無時) 여기(無處)에서 깨어나기만(禪) 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소태산(少太山)의 무시(無時), 무 처선(無處禪)이요. 원불교 선법(禪法)이다. 소태산은 “지금 여기 현존(現存) 하면 도(道) 얻는 것이 밥 먹기보다 쉽다. 그 한가하고 넉넉한 심정이 어찌 저 언(堰)막기보다 어려우리요.” 하시며 “난행(難行) 고행(苦行)도 삼가라” 하셨다.

가장 어리석은 분별은 지금을 불만하며 시간을 들여 적공해서 부처를 이루고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금같이 귀한 지금을 두고, 더 많이 인정받고 성공하기 위해 애타게 노력하며 지위와 명예를 구하고 학력과 재산과 법력을 쌓기 위해 허겁지겁 달리고 있다면, 여기서 멈추고 오직 지금을 무한히 즐기라.

어떤가? 진리는 지금 여기에 충만한 것이다. 진리는 지금 여기에서 늘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일! 지금 만나는 그 사람!’ 여기에 충실하면 바로 진리와 합일되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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