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에 던지는 원불교 신도의 ‘고언’···“증오 벗고 예수님 사랑을”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어느 성당 주일미사에서 한 청년이 “김정은 일가가 하루 빨리 몰살당해 북한이 망하고 이 땅에 평화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올렸다.

미사를 집전한 사제는 미사 후 청년을 따로 불러 “우리 크리스천은 기도 중에 누구를 잘못 되라고 저주는 못해요. 심지어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타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청년은 대뜸 ”내 맘대로 기도도 못하면 성당엔 왜 나와야 하죠?” 하고 반문했다.

이튿날은 청년의 모친이 찾아와서 신부님에게 불쑥 한 마디 던지고 갔다. “신부님, 북한 좋아하시나 본데 이북 가서 사시죠.” 필자는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배웠다. 사랑은 증오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 아니던가?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는 크리스천들이, 비록 일부지만 민족화해와 경제정의라는 정치문제만 나오면 견해가 다른 진보인사들에게 집단적 증오를 가차 없이 쏟아내는 언행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종교인과 정치인은 광화문광장에서 국가원수에 대한 막말을 쏟아 내며 심지어 청와대로 쳐들어가자는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는 기독교 2000년 역사가 그만큼 굴절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로마제국 300년 박해를 벗어나고 유럽전역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 종교는 자기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믿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장검에 새겨 이단자 박해, 십자군전쟁, 마녀화형, 유대인 학살, 30년 종교전쟁을 자행하면서 ‘증오의 종교’로 변신해 온 것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국기독교는 신구교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해방을 맞고 38선으로 국토가 양분되자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반공의 보루’로 변신한 것이다.

신실한 믿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신구교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후대의 역사가 자칫 기독교를 반공을 명분으로 삼는 ‘증오의 종교’로 기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움베르토 에코라는 종교학자는 “우리가 진리임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믿음 바로 그것이 악마다!” 라는 경고를 했다. 아마 이 경고를 무시하면 어느 종교도 마귀 들린 집단으로 표변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1980년 3월 24일, 기독교 나라 엘살바도르에서 크리스천 장군이 보낸 ‘죽음의 부대’는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국민 20만명을 학살했다.

그러던 와중에 크리스천 병사들이 성당으로 들어와 미사를 드리던 로메로 대주교를 쏴죽였다. 대주교가 ‘빨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40년 지난 10월 14일, 로메로 대주교는 ‘정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로 바티칸광장에서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증오의 종교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몇 년 전,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사회학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 비판’이란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라기보다는 증오의 종교에 가깝다. 전쟁, 분단, 독재의 희생자들에게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보다는 그들을 따돌리고 차별하는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는 식민주의 정신과 결별하면서 사회적 영성(靈性)을 기르고, 부자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이 아닌 약자를 감싸주고 균등사회의 실현에 앞장서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며 “약자 편에서 화해사업을 추구할 때 시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 자기 자신이나 권력 또는 돈 혹은 사람의 숫자를 믿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이제 ‘증오의 정치’를 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행하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