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업으로 사는 이여, ‘낙락장송’ 돼야지 않겠소?

낙락장송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사육신(死六臣) 중 한 분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시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생각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데 많은 노력이 뒤따른다. 노력과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세상 어느 것 하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당연한 진실을 가끔씩 망각하곤 한다.

엊그제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 십수억을 받은 청년이 도박의 유혹에 빠져 하루아침에 거액의 돈을 날려버리고 좀도둑이 된 기사를 보았다. 노력 없이 번 돈은 결국 패가망신의 길을 걷는다.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커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를 일러 우리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법칙’이라 한다. 인생에서 성공하지 않으려면 고난과 시련에 예민해질 필요가 없다. 성공하려면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이소성대의 진리를 실현하는 데에는 집중(集中)과 몰입(沒入)이 필요하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집중력이 좋은 사람은 능률이 오르지만 떨어지는 사람은 시간투자에 대비해서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고난과 시련도 마찬가지다. 집중력이 강하고 몰입이 강한 사람에게 고난과 시련은 하나의 과정으로 스쳐지나가게 된다. 성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과정을 통해 소중한 땀을 흘린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다. 성공의 길은 평탄하지 않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실패하면 또 다시 도전하는 자세가 성공의 비결(秘訣)이다.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1644~1737)는 바이올린을 이렇게 만든다고 한다. 미리 선정된 나무를 성장의 어느 적당한 시기에 잘라서 쓰러뜨리고는 계획에 따라 작은 나무 조각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 나무 조각들을 태양열이나 폭풍에 방치해 둔다. 그런 연후에 굽히고, 문지르며, 갈고 닦아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완성한다. 이렇게 거칠게 취급하는 까닭에 보통의 재목에서 세계 최고 명품이 나올 수 있고, 그 음색(音色)이 세계인을 감동시킨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청송불멸(靑松不滅)’이라는 화제(畵題)를 가진 그야말로 ‘낙락장송’을 그린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 화백의 그림 한 점을 갖고 있다. 언제나 그 ‘낙락장송’ 앞에만 서면 숙연(肅然)해진다. 얼마나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저 자리에 우뚝 서있을까?

필자의 신앙·수행시집 <덕화만발>(德華滿發)에 실린 졸시(拙詩) ‘청송불멸’(靑松不滅)이다.

절벽 위의 솔 씨 하나 낙락장송 되었던가
한 마음 발한 혈성 혈인을 나투어서
백척간두 독야청청 청송불멸 노래하네.

초발심 꽃발신심 우담바라 피웠더냐
우담화 피고 지는 봄날의 이른 아침
혈인서천 세운 맹세 여여자연 하구나.

오늘을 참아내면 내일이 편안하다. 잠시 참는 고난이 나중에는 ‘보리도’(菩提道)를 이루게 된다. 정산(鼎山) 종사 <법어>(法語) ‘응기편’(應機編) 7장에 인욕(忍辱)에 관한 법문(法門)이 나온다.

“송죽은 상설(霜雪)을 지냄으로써 그 절개를 얻고, 보살은 인욕으로써 그 마음을 기르나니, 인욕의 공부는 처음에는 죽순 같고, 다음에는 대 같고, 마침내는 태산교악(泰山喬嶽) 같아 만세에 뽑지 못할 힘이 있고, 마음 넓히는 공부는 처음에는 시내 같고, 다음에는 강 같고, 마침내는 대해 창양 같아서 불가사의한 역량이 있느니라.”

낙락장송은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니다. 욕됨을 참고, 모든 번뇌 망상을 털어 버리며, 팔만사천 마군(魔軍)이의 시험을 이겨내야 된다. 한 세상 살다 가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뿌리 채 뽑혀서야 어디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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