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 금이 갔을 때, 믿었던 친구가 배신했을 때···<영육쌍전> 일독을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수행(修行)은 왜 하는 것일까? 수행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삼매(三昧)의 힘을 길러 견성(見性)하고 성불(成佛)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불보살들은 자기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바른 법을 설하여 중생들 스스로 이 고통의 바다를 영원히 헤어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수행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성불은 어쩌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불법이 생겨나 수행법도 아주 쉽게 누구나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원불교의 수행법이다. 원불교의 수행법은 마음으로 깨우치고, 몸으로 익히며, 몸과 맘으로 실행한다.
대부분의 종교, 특히 서양 종교는 과학과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지동설과 천동설, 진화론과 창조론 등, 과학과의 투쟁에서 결과는 항상 과학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예외의 종교가 원불교다. 원불교는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교리의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의 나오미 아이젠버거 박사는 2003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실험 논문 한편을 발표한다. 연구팀이 입증한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이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동일하다는 학설이다. 우리가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 때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 ‘심장에 못이 박힌 것 같다’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몸이 아프다’는 표현을 한다.
이런 언어 습관에 착안해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연구팀은 정신 고통과 신체 고통을 처리하는 두뇌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뇌에서 신체적 고통을 처리하는 영역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에도 똑같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뼈에 금이 갔을 때와 믿었던 친구가 배신했을 때, 고통을 처리하는 뇌 영역은 정확히 일치했다. 반대로 마음의 고통을 겪을 때 몸의 고통을 완화하는 진통제를 먹으면 마음의 상처도 낫지 않을까라는 실험을 했는데, 정신적 고통이 좀 줄기는 했는데 긍정적 감정이 늘지는 않았다.
이것은 마음의 고통이 몸의 고통보다 더 강력하다는 의미다. 부러진 뼈는 언젠가 붙지만, 마음의 상처는 원래대로 회복하기 어렵다. 우리가 남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은 모두 수긍한다. 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가 문제라는 것에는 무심하다.
과거 수행에서 마음은 선(善)이고 몸은 악(惡)이라는 이원론적 사상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육신을 괴롭히고, 물질적 욕망을 끊는 행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고행 수행법이었다.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주로 행했던 수행법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할 때, 고행 법을 접했으나 자신이 수행해본 결과 몸만 괴로울 뿐 참다운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적인 고행주의와 또 다른 수행법인 수정주의의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수행(中道修行)’을 주장했다.
그러나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다. 「과거에는 부처님께서 모든 출가 수행자에게 잘 입으려는 것과, 잘 먹으려는 것과, 잘 거처하려는 것과, 세상 낙을 즐기려는 것들을 다 엄중히 말리시고, 세상 낙에 욕심이 나면 오직 심신을 적적(寂寂)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낙을 삼으라 하시었으나, 나는 가르치기를 그대들은 정당한 일을 부지런히 하고, 분수에 맞게 의식주도 수용하며, 피로의 회복을 위하여 때로는 소창도 하라. 인지(人智)가 발달되고 생활이 향상되는 이 시대에 어찌 좁은 법만으로 교화를 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원융(圓融)한 불법으로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에 두루 활용되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내 법의 주체다.」
몸과 마음은 공부의 주체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시에 몸의 건실한 유지를 중시한 것이다. 또한 육신의 건강을 지키면서 종교수행을 하는 것이 대승수행임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은 수행하고 보은하는 근본인 것이다. 바로 영육쌍전(靈肉雙全)은 ‘영’과 ‘육’의 조화롭고, 건강한 수행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과 맘’의 원융한 불법이 원불교의 주체(主體)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몸의 기운이 ‘수승화강(水昇火降)’의 과정을 거쳐 정화(淨化) 된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 수행법이다. 이러한 본성에 머무르려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업(罪業)을 정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후천적인 성품(性品)을 정화해서, 본래의 자기 생명의 모습, 즉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불가(佛家)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수행이 깊은 선승(禪僧)들은 자신이 언제 입적(入寂)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몸(身)과 마음(心)이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관리를 잘하는 것이 몸 관리를 잘하는 것이고, 몸 관리를 잘하는 것이 마음관리를 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