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 김삼환-김하나 목사 세습을 보는 두가지 시각
한국 최대교회의 하나로 알려진 서울 강동구 명일동 명성교회의 담임목사직이 김삼환-김하나 목사 부자로 이어지면서 교계 안팎에서 ‘부자세습’ 논란이 일었다. 7월 16일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재판국은 ‘재심’을 연기했다. 세간의 관심과 교회 내부의 입장과 절차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시아엔>은 김삼환-김하나 목사의 담임목사 세습(또는 승계)과 관련한 교계의 목소리를 전한다. 이 글은 <아시아엔>의 공식입장이 아니며, 반대의견을 펴는 글도 환영하며 이를 독자들에게 전할 예정이다.<편집자>
사회학적인 접근과 종교학적인 접근
[아시아엔=황규학 목사, 법학박사, 종교법학회 총무역] 한국의 대형교회 세습건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접근, 종교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면 혈연세습은 기득권 세습이자 부의 세습으로 적폐청산 대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종교학적인 관점에서의 세습이라면 聖의 세계에 대한 접근으로 혈연세습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전통을 이어가는 영적인 승계라고 볼 수가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말하듯 사회적인 접근은 속의 세계로서 △혈연세습 △기득권세습 △적폐의 세습으로 윤리적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聖적인 것보다 俗적인 접근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동성애의 인권도 중시하고, 이슬람 세력도 한 국민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한국사회에 동화될 수 있어야 하고, 북한의 혈연세습은 다른 나라의 세습이기 때문에 내정간섭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특히 오늘날 기독교가 성장하고 대형교회가 발생하면서 성보다는 속적인 현상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교계 언론이 아닌 일반매체가 조용기, 김기동, 이재록 목사 등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들의 종교인으로서 聖적인 부분보다 俗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聖적인 부분보다, 俗적인 부분으로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성교회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의 俗을 통한 聖의 활동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만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외부에 대해 사회학적인 접근을 할 수 있도록 빌미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한말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독재정권에 대해서 투쟁을 하는 등 기독교는 일제시대, 6.25전쟁과 배고픔의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화의 역군으로 중심역할을 하여 속에서 성을 드러내는 종교였다.
한국역사에서 기독교는 항시 俗과 함께 한 聖이었다. 특히 명성교회는 속을 통하여 성을 실현하는데 앞장 선 것이 사실이다. 민간 교도소와 국내외 병원, 학교, 시골 목회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관 설립·운영, 해외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지급, 선교단체·미자립교회 지원,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의 집 등은 모두 俗에서의 聖의 활동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성스런 실현’이다.
그러나 최근 아들의 목회승계는 외부인들에게 聖의 승계보다 俗으로의 승계로 비쳐지고 있다.
명성교회의 俗에서의 聖적인 활동
명성교회의 아들에 의한 목회승계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는 속으로의 승계이고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영적인 승계다. 7월 16일 총회재판국이 명성교회건에 대해서 재심을 연기한 것도 윤리적이거나 사회학적인 관점보다 종교적이고 영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지나칠 정도로 교회에 대해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다 보면 종교의 성의 세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막시즘이나 공산사회에서는 종교도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다 보니 적폐청산의 대상이고, 사라져야할 대상이다.
물론 종교가 聖적 기능을 상실하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종교의 聖적 기능은 사회에의 봉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 해외선교사 지원, 학교를 세워 문맹퇴치, 병원을 통한 약자들 치료, 개척교회 목사들 지원, 죄수들의 갱생, 지적인 엘리트 육성,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장학기금 전달 등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명성교회는 종교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명성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연속선상에서 무리없이 잘 해내기 위하여 아들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최근 대형교회의 후계자 승계의 실패로 인해 교회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망교회, 충현교회, 영락교회, 사랑의교회, 광성교회, 서울교회, 한교회(강남제일교회), 주안장로교회 등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로서 후계자 승계에 실패한 교회다. 그러한 차원에서 명성교회는 지금까지 해왔던 성스런 일들을 잘 진행하기 위하여 외부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왕조시대나 북한도 아니고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혈연승계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의 승계가 있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의 혈연 동생 야고보도 예루살렘 총회장을 지낸 바 있다. 베드로의 형제도 예수의 제자로서 일을 했고, 예수의 혈연어머니는 천주교에서 지금까지 경칭을 받고 있다.
성경은 혈연을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혈연을 초월하여 모두 신께 봉사하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는 아들의 목회승계는 축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혈연의 목회승계는 적폐대상으로서 보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보다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에 대한 종교적인 접근
명성교회에 대해서는 사회학적인 관점보다 종교적 관점인 성경과 장로교 통합교단의 헌법적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종교적 승계라고 해도 일반사회에서는 해당교단의 기초적인 교회법에서 하자가 없어야 한다. 적어도 사회학적인 접근은 고사하고서라도 종교적인 관점이라고 해도 종교단체의 법에 위배되지 말아야 한다.
명성교회가 聖적인 정당성을 갖고 혈연세습이 아니라 영적인 승계가 되기 위해서는 왕조시대나 북한체제처럼 일인독재체제가 아닌 무기명 비밀투표가 보장된 민주단체와 종단의 법과 상위기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외부의 비판세력들은 지나칠 정도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는데 익숙하다. 명성교회에 대해서는 종교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매일 새벽예배에 수천명이 모이고, 주일예배에 수만명이 모여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내는 것을 분석하는데 사회학적인 접근으로는 한계에 부닥친다.
세밀하게 말하면 가이사 나라의 법이 아니라 카톨릭처럼 종교단체의 법과 성경의 정신을 갖고 종교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 접근이라고 하더라도 후계자에 대해서는 왕조시대나 독재시대처럼 일인이 아니라 단체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하여 선택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김삼환-김하나 부자승계에 대한 재판국원들의 재심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명성교회는 교회의 대의 정체제도인 당회원들과 총유권자인 신도들이 종단헌법대로 2/3이상의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하여 선택했다. 또 상위 치리회인 노회가 이를 인정했고, 총회의 법리부서는 “세습방지법은 장로교 교인의 자유를 훼손하고 선거라는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어 위헌”이라고 해석했다. 재판국도 “아들의 승계가 장로교정체성에 하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명성교회는 당회, 공동의회, 노회와 총회라는 단체가 절차와 회의를 통하여 좌지우지한 것이다. 헌법위원회와 총회 재판국이 이렇게 결정한 것은 교단헌법에 ‘교회의 자유’라는 조항이 있어서 개교회의 인사와 행정문제는 개교회가 자율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는 상위치리회의 결정이나 영향 없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부의 세습보다 영적인 세습을 원한 신도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의 승계에 대해서는 김삼환 목사가 전적으로 개입·간섭할 여지가 있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것이 장로교회이기 때문이다. 명성교회에 대해서 사회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종교단체의 법을 갖고 접근할 때 ‘혈연세습이 아니라 목회승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신도들이 종단의 법을 갖고서 선택했기 때문이다.
명성교회 신도들은 김하나 목사에 대해 부의 세습을 허락하지 않고 영적인 승계만 원했다. 명성교인들은 적어도 39년 동안 김삼환 목사 부자의 삶을 보아왔기 때문에 아들이 영적으로 승계해도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혈연세습이 아니라 영적인 승계였던 것이다.
외부에서는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종교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성교인들은 윤리적, 사회학적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외부 시각과 내부 시각이 이처럼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