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출신 예비역 장군은 ‘5·18 재조사’ 이렇게 본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5·18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이 네번째다. 기왕 시작되었으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조사가 불완전하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민간단체에서 조사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지금까지 조사가 부진하다는 것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발포명령자를 가려내는 것이 그렇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포명령자라는 것을 가려내고 싶겠지만 그것은 당초 틀린 생각이다. 당시 정국을 쥐고 흔든 것은 전두환이지만 보안사령관이 발포명령자라는 것은 아무리 뒤져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 지휘계통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군에서 작전명령은 엄격한 지휘계통에 따라 내려온다. 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진 것이 12·12다.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재가가 내려진 것을 가정하고 계엄사령관을 습격한 것이 12·12다. 그 이후는 지휘계통이 아니라 사적 인과관계인 하나회를 동원했다. 지휘계통이 엉망진창 되어 버렸다. 황영시 1군단장이 이건영 3군사령관 명령을 거부하고 노태우 9사단장에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하였다. 이것이 12·12를 군사반란이라고 하는 이유다.
보안사가 군에 대한 영향력이 큰 것은 그때까지의 적폐였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5공이 출범하는 당시 보안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영향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작전명령이 보안사 계통으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12·12로 망가진 군의 지휘계통이 전두환이 전권을 잡은 후 곧 정상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을 발포명령 계선에 집어넣기는 무리가 따른다.
군령계통은 818 이전과 이후는 크게 다르다. 818 이전에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었다. 광주사태에 관한 계엄업무는 참모총장-2군사령관-전투교육사령관-31사단장 선에서 이루어졌다. 출동한 7공수여단은 특전사에서 2군으로, 2군에서 다시 31사단으로 배속되었는데 11대대, 13대대, 15대대가 전남대학교 학생을 과격하게 제압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에 살상을 자행한 것이 광주사태의 촉발 원인이다. 이후 광주사태는 민주화항쟁으로 변해나갔다.
5·18의 실상은 30년 후에나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시 최세창 특전 3여단장의 술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민군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전남도청에 최종 진입한 부대는 20사단이다. 특전사 대대들이 아니다. 당시 계엄군에서도 51만발은 과도하게 많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방송에 나온 평론가 중에는 “20사단이 광주시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더 많은 실탄이 사용되었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오히려 작전의 실상을 지적하는 발언이라고 본다.
2차대전에서 미군이 적 1명을 사살하는데 8000발의 M-1 소총탄이 사용되었다는 통계가 나온다. 지금 5·18의 실상을 밝힌다 해도 ‘2017년판’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진상조사에서는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적지 않은 숫자의 피살자에 대해서도 밝혀내어 지금까지 九泉을 떠도는 ?魂들을 달래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