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6차 핵실험] 문제는 외교다···”전술핵 배치 재고를”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45년 8월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자 소련은 일·소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만주와 조선에 침공했다. 일본은 항복했다. 그 충격은 원폭에 받은 것보다도 컸다. 소련이 중립조약을 파기했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할 것인가? 군사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외교력은 빈껍데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1991년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과 외교부가 주도한 한반도비핵화선언은 성급한 것이었다. 이를 깨뜨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북한이다. 앞으로도 한반도비핵화의 정신은 계속 존중하되, 이 안보현실을 정확히 반영해야 한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메티스 장관과의 회담에서 전술핵 배치를 언급했다가 청와대에서 제동을 걸자 국내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고 남 말하듯 미봉하는 작태를 보였다. 정경두 합참의장이 청문회에서 벌인 것과 똑 같다. 전술핵에 대해서 강경화 외교장관과 정의용 안보실장의 인식에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안보문제를 외교부 출신이 과도하게 간여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다. NSC에서 방사포와 미사일을 구분 못했다니 어이가 없다.

국방대 명예교수인 허남성 박사가 저강도 군사 대응 옵션도 있다는 글을 실었다. 랜드연구소 베넷 박사의 ‘저강도 군사적 행동’을 인용한 것인데, 동해에서 평양 상공을 거쳐 서해 공해상에 이르는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라든지, 북한 영공 상층부를 가로지르는 고고도 정찰비행, 그리고 발사된 북한 미사일의 요격 등 저강도의 ‘군사적 행동’을 제안했다. 북한 핵과 평화협정을 교환하자는 키신저의 허황된 요설(饒舌)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전략적 아이디어다.

한국 문제를 깊숙이 연구한 베넷은 1974년 파리평화조약으로 월남 공산화의 길을 터주어 미국에 패전의 치욕을 남겨준 키신저와 다르다.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위안부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입장이다. 당시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이 급했기에 이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하토야마의 ‘痛惜의 念’으로 한국에 대한 진사는 됐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자 박근혜 정부에서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구절을 받아내어 쐐기를 박았다.

박근혜가 소위 중국의 전승절에 천안문 광장에 서서 무력시위를 구경한 해괴망칙한 짓을 벌인 것도 외교부를 통해 교섭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국이나 중국의 외교실무라인에서 이를 이용해보자고 합작한 것이 박근혜와 시진핑을 기망(欺罔)한 것이다. 한미동맹의 정신이나, 주권사안인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이 소동을 벌이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시진핑은 박근혜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치욕이 어디 있는가? 삼전도 굴욕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일본을 넘어 태평양으로 미사일을 날리자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베 정권이 북한 핵을 빌미로 재무장의 빌미를 삼으려 한다는 비판도 하지만, 자기 국토 위로 미사일이 날아가니 국민이 기겁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한 신문은 ‘북한, 일본에 과시, 한국은 무시’라는 제목을 달았다. 매우 적절하다. 북한은 한발 더 나아가 이번 발사로 국치일(8월 29일)에 일본에 복수했다는 의미도 부여했다. 한국에서는 경술국치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북한은 이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994년 북핵 협상에서 강석주는 갈루치를 보기 좋게 농락했다. 우리는 같은 한국사람(조선인)으로서 왜 이렇게 다른가? 문제는 외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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