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부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영국 유학생 91명 박근혜 대통령 퇴진 성명
[아시아엔=편집국] 런던정경대(LSE),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등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연구자 91명이 11일(한국시간)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질서 파괴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의 책임을 묻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치·경제·역사·신학·화학·뇌언어학·사망학 등 43개 전공분야에서 유학중인 이들은 특히 성명서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적·구조적 문제에 대한 정치·철학·경제·문화·역사·외교·도시·종교·교육·국제개발·창조산업 등 각 분야 전공자들의 분석과 제언을 담고 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하고 검찰 역시 더 이상 이 사태의 공범이 되길 자처하지 말고 관련자들의 책임을 명명백백히 물으라고 촉구했다.
성명서는 “박 대통령이 ‘나라의 국정책임은 대통령이 지고 나라의 운명은 국민이 결정하는 것입니다’라고 취임식에서 강조했던 이 말을 이제 본인에게 돌려주고자 한다”며 “나라의 운명은 민주주의의 대의를 따라 오로지 국민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과 명단 등
헌정파괴 및 국정농단의 책임을 묻는 在영국 박사/연구자들의 입장
학문의 존재의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고국을 떠나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연구에 힘써 왔던 것도 바로 그 바람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국에서 들려오는 국정농단과 헌정유린의 소식은, 우리 희망의 근본을 위협하고 우리를 참담함과 상실감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배움과 진리 탐구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 침묵하고 한 발자국 물러선다면, 우리들이 추구했던 가치들도 한참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느낀다.
국가권력의 사유화, 기득권층의 부패, 공적시스템의 붕괴가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고취하고 그 권리를 보장한 헌법22조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으며, ‘배우고 물음(學問)’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학문의 본질마저 흔들리고 있다. 최소한의 합리성이 부정되고 자유로운 비판을 통한 논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하지 않는 개탄스러운 오늘의 현실이 사상 초유의 헌정질서 파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체념과 침묵이 우리의 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찰과 제언이 우리 연구자들의 답이 되어야 함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에 우리는 연구자 본연의 책임과 자세를 되돌아보며, 이번 국정농단으로 드러난 본질이고도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병폐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고자 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 성명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가 제언한 근본적 개혁을 지휘할 국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이미 상실했음을 선언한다. 헌정질서를 수호할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잃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을 요구한다. 검찰 역시 더 이상 이 사태의 공범이 되길 자처하지 말고 관련자들의 책임을 명명백백히 물을 것을 촉구한다.
“나라의 국정책임은 대통령이 지고 나라의 운명은 국민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강조했던 이 말을 이제 본인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나라의 운명은 민주주의의 대의를 따라 오로지 국민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의 분노에 찬 심판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잿더미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질곡의 역사 속 한가운데 우리 국민은 언제나 위대했으며, 나라 곳곳에서와 먼 타국에서까지 행동에 나서는 시민들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본다.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또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주어진 시대의 책무를 우리는 다할 것이며, 그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이다.
* 본 성명서는 서문과 함께 정치, 경제, 외교, 문화예술 등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쓴 12문단의 문제제기 글을 엮어 만들었다. 각 연구자는 향후의 저작을 통해 이곳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상술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 계획 중이다.
?작금의 현실 앞에 최초의 민주주의의 모습을 돌아본다. 도편추방제(ostrakismos)는 소수 엘리트가 아닌 다수 대중(demos)의 지배(kratos)를 실현하려 한 ‘아테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제도 중 하나다. 참주의 출현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매년 치러지는 투표에서 일정한 정족수 이상의 시민들이 한 사람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 제출하면, 그 사람은 변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도시국가 밖으로 추방됐다. 억울한 추방자들을 낳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권한을 사유화하여 독재를 자행하는 자의 출현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이 제도는 유지되었다. 2500년전 아테네 아고라에 모여 국정을 논하던 시민들이 묻는 듯하다. ‘국정을 농단하는 이들의 출현을 막지도 못하고 하물며 그런 이들을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지도 못하면서 당신들은 어찌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 자신하는가?’
?돌이켜보건대 대한민국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민주공화국’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가난한 농민들의 봉기에 위정자들이 청나라 군대로 대답한 동학운동까지 거슬러 갈 필요도 없이, 오늘날 현실에서 보듯 우리는 밖으로는 외세에 의존하고, 안으로는 약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생존해온 것은 아니었던가? 결국 우리 사회가 모든 국민의 공동체로서 공공성의 표현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성이 결여된 나라에서 국가는 사적인 이익 추구의 각축장이 되고 마는 것이니, 작금의 국정농단사태는 그것의 한 극적인 단면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제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으니, 바로 지금이 약자의 희생으로 유지되던 오랜 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해나가야 할 때이다.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경험한 많은 국가들은 독립 이후에도 지배국이 남겨 두고 간 여러 가지 정치·사회 문제들로 고통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그것을 답습한 독재정권을 거치며,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한 관료적 권위주의 (Bureaucratic authoritarianism)의 체제로 식민잔재는 계속 남아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박근혜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였고, 권력을 사유화하여 헌정을 유린하였으며, 자본과 언론은 이권을 좇아 이 기형적 체제를 지탱하였다. 국정농단을 눈감아왔던 세력들은 이제 최순실에게 모든 것을 돌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번 헌정파괴의 근본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식민잔재는 영원히 청산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이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누구인지를.
?한 나라의 경제는 ‘좋은 제도(institutions)’를 통해 성장한다. 좋은 제도란 개인의 정당한 노력의 열매를 본인이 가져갈 수 있게 해주는 여러 장치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제도가 갖춰진 사회에선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져 기술과 지식의 진보가 일어나고 결국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지게 된다. ‘비선 실세’의 비정상적 권한과 영향력은 우리 제도의 후진성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최근 몇 년 성장률이 떨어지고 고용이 악화되며 국가와 가계의 부채가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는 것은, 경제주체들이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권력과의 거리를 줄이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것이 제살 갉아먹기인 줄도 모른 채 부와 명예가 주는 찰나의 쾌락에 취해 모두가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남개발을 필두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토건국가의 신화를 통해, 정부는 왜곡된 발전의 정당성을 설파해 왔다. 그것의 이면에는 기업과 관료의 은밀한 결탁을 바탕으로 부동산을 통한 부정축재가 만연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개발신화는 전 정부의 치적이라 불리던 4대강 정비 사업에서 그 정점을 찍은 뒤 박근혜 정권에 들어와 각종 부동산 투기와 관련된 규제 철폐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밝혀지고 있는 부패의 핵심에 부동산 문제가 엮여 있음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을 권장하고 정당하게 노력한 사람들은 배제되는 사회에 미래는 있는가? 청년들은 몸 하나 편히 누울 곳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주택보급률 100%란 수치는 오히려 허상에 가까워보인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는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제2의 최순실을 다시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토건국가의 기형적인 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창조경제. 지난 4년간,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숱하게 들어온 박근혜 정부의 최우선 정책이다. 1755년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사전(Dictionary)』에서 ‘창조하다’를 ‘없는(無) 것에서 만들다’라고 정의했다. 현재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개념을 『창조경제』의 저자 존 호킨스(John Howkins)는 ‘신적인 독창성에 대한 당대 믿음의 반영’이라고 평가했다. 박근혜 정부는 위임 ‘없는(無)’ 권력을 창출하고, 검증 ‘없는(無)’ 인사를 단행하고, 지지 ‘없이(無)’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니, 과연 신적 믿음에 기반을 둔 구(舊)시대적 창조의 개념을 2016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인가? 창의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有)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있으며 이는 자율성으로 부터 시작된다. 예술검열, ‘블랙리스트’와 같이 문화예술계의 자율성이 탄압받는 현 상황에서 창조경제는 사상누각일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정책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문화독재가 아닌 자율과 창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창조시대를 우리는 꿈꾼다.
?지난 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즈는 “박 대통령, 나라의 공주에서 꼭두각시로 배역이 바뀌었다(a nation’s princess recast as puppet)”고 논평했다. 외교의 목적은 국익을 증진시키며 국민 안전을 보장하는 데에 있으며 그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그간 박근혜 정부는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위안부합의, 갑작스런 개성공단폐쇄, 독단적인 사드배치, 국가기밀문서 유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존립에 영향을 미치는 외교사안을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인 방식으로 대하며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러한 작금의 사태에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서두르고 있으니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국가 안팎으로 신뢰를 잃은 식물정부는 더 이상 외치에 나설 수 없으며, 전문가를 주축으로 자국민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외교의 기본을 하루 빨리 세우기를 촉구한다.
?국제개발협력의 원칙은 투명성, 효과성, 책임성이다. 불투명하고 효과 없이 무책임하게 집행되는 원조는 오히려 ‘독(毒)’이다.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한 우리의 경험은 국제사회의 큰 주목을 받아왔다. 가난을 몸소 체험했던 어르신들은 ‘이제 우리도 다른 나라를 도와야지’라며 흔쾌히 정부의 원조정책을 지지했고, 청년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부를 하며 빈곤퇴치에 힘을 보태왔다. 하지만 졸속으로 시행된 ‘코리아에이드’ 사업은 국제개발협력의 기본적인 원칙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총체적 실패임이 드러났다. 이동차량에서 쌀과자(K-meal)를 나눠주며, 태권도(K스포츠재단)와 K-pop을 홍보하는,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이 촌극은, 수혜국을 존중하지 않는 구시대 원조의 전형이다. 우리정부가 과연 다른 나라의 발전에 대해 함부로 조언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이 순간. 우리는 ‘국가의 발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에 대한 국정농단 세력의 개입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우리의 원조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허용하고 (허용적 평등), 교육의 기회를 차단하는 지리적, 사회·경제적 제반장애를 제거하며 (보장적 평등), 학교의 교육여건을 평등하게 하여 (교육조건의 평등) 결과적으로 사회적 평등을 도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연구를 통해 교육의 기회가 소득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 검증되었으며, 이러한 불평등은 고스란히 진학, 취업에 연결되어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고 있다. 자본과 권력을 등에 업은 특정 학생을 위해, 대학은 입시 규정을 변경하고 교수는 성적을 위조하는 행태를 보며, 우리의 교육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교육이 곧 미래라는 것을 되새기며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평등한 교육권, 그 최우선의 가치를 회복하는 시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건강정책학자 길 월트(Gill Walt)는 ‘가장 합리적이어야 하는 건강정책에서 조차, 그 형성과 집행과정은 정치권력에 매우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메르스 사태로 드러난 공중보건체계의 허술함, 높은 자살률, 두 살배기 어린이의 사고 앞에 유명무실했던 중증외상체계, 건강보험 부과방식 개편 등, 당장 시급한 과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정치권력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정부는 일찌감치 영리의료법인의 설립을 승인했고, 민영의료보험의 가격규제마저 풀어버렸으며, 고령화와 증가하는 만성질환의 검증된 해법인 ‘일차의료강화’를 제쳐두고 원격의료 도입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권력의 사유화와 특정기업 밀어주기 식 건강정책 사이의 연관성은 의혹을 넘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부패한 권력이 건강정책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있는 그 순간, 무고한 희생은 계속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책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 건강권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정부 본연의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세계는 종교의 이름으로 무수한 테러의 피해를 입어왔다. ‘십자군’ 역시 교황이 기독교를 도우려 파견한 군대였지만, 상당수 십자군은 기독교인을 약탈하고, 기독국가를 점령하고, 기독교 소년병을 노예로 팔았다. 최태민이 세운 ‘구국십자군’도 표면에 하나님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당시 초법적 지위에 있던 영애(令愛) 박근혜를 앞세워,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돈을 갈취하는 범죄조직이었다. 이번에는 대를 이어 그의 딸이 다시 한 번 대통령을 팔아 입법, 사법, 행정부 위에 군림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이것은 권력자를 시스템과 원칙을 넘는 초월적 존재로 신봉하는 과거의 유산이다. 다시는 신의 이름으로도, 그 어떤 권력자의 명령으로도 헌정질서를 유린할 수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무한 권력의 절대자가 아니라, 책임과 권한이 유한한 공직자일 뿐이다. 이 기본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국정농단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건축을 구현하는데 있어 건축가의 디자인역량은 기본적인 자질이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 신뢰의 구축이다. 이는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된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이 안이한 전시행정으로 인해 전소(全燒)되었다. 그 복원에 나선 국가의 대목(大木)은 사리사욕을 탐한다. 언제나 그렇듯 근시안적 시스템은 결국 총체적 부실복원공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부실은 곧 잊혀지고, 찬란한 역사성을 간직해왔던 숭례문은 ‘비슷한 듯 다르게’ 그 자리에 서 있다. 숭례문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당위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현 정권은 자발적으로 전소되어야 할 것이다. 국보의 소실과 복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시스템도 부재하고, 있는 시스템은 신뢰할 수 없는, 엉켜버린 비합리적 의사결정의 과오를 성찰할 수 있다면 잿더미에서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를 복원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주권이 국가 원수가 아닌 국민(Demos)에 의해서, 그리고 그 국민들이 모인 광장 (Agora)에서 실현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재의 모습은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나아가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제 광장에 모인 국민들의 목소리에 엄중히 답해야 할 것이다.
2016년 11월 11일
재 영국 한인 박사과정/연구자 91인
참가학교(24개):
런던정경대(LSE),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워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킹스칼리지런던(KCL), 더럼, 버밍엄, 케임브리지, SOAS, 요크, 브리스톨, 워릭, 옥스퍼드, LSHTM, 리즈, 노섬브리아, 미들색스, 셰필드, 에딘버러, 엑시터, 왕립예술대학(RCA), 왕립수의과대학(RVC), 카디프, 캔트, 코톨드 미술학교
참가자(91명):
강이연(커뮤니케이션), 고코리아나(사회정책), 곽길희(정치), 곽민수(이집트학), 구교선(철학), 구은조(개발), 권영빈(사회정책), 김경미(응용언어), 김관욱(인류), 김기태(사회정책), 김동영(전기전자), 김봉준(공학), 김상준(국제보건정책), 김원석(사회), 김연중(수의학), 김유림(교육), 김정원(신학), 김주영(국제정치경제), 김지현(도시계획), 김튼튼(물리학), 김현태(물리), 한디디(인문지리), 류기한(물리), 박경렬(국제개발), 박규현(언어), 배재훈(토목공학), 백승호(사회정책), 백중환(로보틱스), 서앨리(사회정책), 서영민(사회정책), 서정희(사회정책), 소가영(국제개발), 신상원(한국학), 양난주(사회정책), 오도영(도시계획), 오상순(물리), 오승훈(응용사회), 원상호(화학), 유동철(사회복지), 유보원(화학), 윤대근(사회정책), 이소현(국제관계), 이양석(생명과학), 이영준(경제), 이유철(정치), 이은희(문화정책), 이의정(경제), 이재화(전자공학), 이주성(경제), 이지숙(면역학), 장영욱(경제사), 장익현(사회정책), 정민아(사회정책), 정선욱(사회복지), 정지훈(철학), 정진한(사학), 정진호(인문지리), 조강철(경제), 조경희(정치), 조명진(사망학), 조아라(환경경제), 조준화(정치), 조현아(서양고전), 조현지(도시계획), 최지원(중동정치), 최향미(커뮤니케이션), 최훈석(뇌언어학), 한철우(금융), 황선영(경영) 외 22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