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선원 법현스님의 동행] 이웃종교와 잘 지내시오, 하늘 축복 넘치리니···

[아시아엔=법현 열린선원 원장스님, KPRC 종교간 대화위원, 성공회대 ‘스님과 함께 하는 채플’ 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초빙연구원] 한국에는 종교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세계종교인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 그리고 종교와 비종교의 사이에 있다고 느끼는 유교가 한국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종교도 아주 많이 활동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정말 신기하고 놀라며 부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쓰이지 않는 말을 한국에서는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는 ‘다른 종교’ 또는 ‘타종교’(other religion)라는 용어를 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웃종교’(neighbor religion)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라는 말과 이웃이라는 말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는가. 이웃은 사촌 또는 그보다 가깝다는 말이 있으니 정말 친근하게 느껴지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종교간 다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싸움은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시 가운데 하나이며 노래로도 즐겨 부르고 있는 것이 ‘저녁에’라는 김광섭의 시다.

Pope Francis, third from right, talks with Han Yang-won, second from left, chairman of the Association for Korean Native Religion, as he meets with South Korea's religious leaders at Myeong-dong Cathedral in Seoul, South Korea, on Monday, Aug. 18, 2014. (AP Photo/Jung Yeon-je, Pool)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시는 유심초라는 듀엣 가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이름의 노래로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노래의 백미는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이리라. 누군가와 그리고 무엇인가와 언제 어디서나 그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는 바람이 잘 들어있는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돌고 아 만나게 된다는 불교 또는 인도의 윤회사상을 느끼게 한다. 불교에서 그것을 바람직한 결과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면 윤회한다는 것이지 윤회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목표는 윤회하는 삶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설을 받아들였기에 불교의 사상이라고 생각하여 불교도들은 더 친근하게 느낀다. 실제로 지금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교, 유교, 불교를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먼 앞 시대에는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을 지 가늠하거나 확언하기 어렵다. 물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느 종교를 믿고 있든지 편하게 만나고, 기쁘게 만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웃종교 간의 만남은 꼭 필요하다. 불교, 유교에서는 긍정하지 않으나 모든 존재가 다 절대자인 하느님(여호아, 알라)의 피조물인 것을 믿는다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거기에 무슨 종교의 구별이니, 성의 구별이니 누구끼리 좋아하느니를 가리고 차별한다면 그 어찌 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 할 수 있을까?

필자의 ‘디딤돌과 걸림돌'(제비꽃 사유)이란 시다.

좋은 돌이라도

제 자리를 못 잡으면 걸림돌이다.

설령 좋지 않은 돌이라도

제자리를 잡으면 디딤돌이 된다.

걸림돌을 돌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돌을 쪼아 대지만

위치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돌을 옮겨 디딤돌로 만든다.

지하철의 풍경소리 게시판에 요사이 걸려 있는 글이다. 대화에서도 쓰임새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유려한 연설만이 대화가 아니다. 투박한 대화, 때로는 말없음의 표정도 대화다. 있는 그대로 보고 혹시 이상하게 보이면 바꾸려 하지 말고 옮겨서 보면 어떨까 싶다.

종교간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의 종교대화를 이끌어 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단체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다. 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와 종교연합선도기구도 있다. 세계종교도 시카고종교회의 이래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세계종교의회(P.O.D.E.R) 세계종교연합선도기구(U.R.I.W) 등의 대화기구가 있다. 대표지도자들이 만나는 대화도 있고, 대표기구에 속하는 회원들과 지도자들이 함께 만나는 대화도 있다. 또 의회를 열듯이 다양한 대화를 하는 모임도 있다.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동안 100년이 넘는 종교간 대화와 가톨릭의 제2차 공의회에서의 ‘非그리스도선언’ 즉 ‘교회 밖의 구원’ 또는 ‘예비그리스도인’이라는 틀 안에서의 대화도 있다. 또 많은 학자들이 좋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틀일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그리고 기쁘게 만나는 것이다. 함께 만나서 기쁘게 웃고 담소하며 맛나게 먹고 한곳에 머물면서 오래 대화하거나 여행하면서 느낌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은 길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우며 너도 그렇다”고 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대화에서도 금과옥조다. 그 사랑은 미래의 구세주인 메시아(Messiah)와 미륵(Maitreya)의 덕목이다. 슬기로운 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이가 슬기롭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와 마이트레야의 어원이 같다는 점도 재미있다. 우리는 대화하는 동물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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