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권하는 어머니 살해 IS 소년병···이슬람 성전 ‘지하드’ 5가지 유형

NISI20160114_0011244685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근래에 IS 테러집단의 테러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새해 1월12일에도 터키의 유명한 술탄광장에서 IS의 테러가 일어나 많은 인명이 살상(殺傷)되었다. 13일에도 인도네시아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지난 해 연말 파리의 연쇄테러도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IS는 그 후 성명에서 “프랑스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국가들이 IS에 대한 자신들의 정책을 철회하지 않는 한, 그들은 IS 최상위 타깃이며, 죽음의 냄새가 그들의 코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결국 그들의 협박은 우리 대한민국에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들은 이런 잔악한 테러를 성전(聖戰)이라고 호도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전 지하드’는 무슨 뜻일까?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서기 622년 신도 72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메디나로 떠난 때를 기점으로 이슬람력(曆) ‘헤지라’ 원년이 시작된다. 이슬람력(헤지라) 원년에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메디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세 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 무함마드가 신의 사도라는 주장에 반발하고 나선 유대인들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이들은 살아가기 위해 메카에서 다마스커스로 떠나는 대상들을 공격해 약탈하는 형태로 부를 쌓으며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유대인 세 부족은 무함마드에 대항하려다 패하고 추방되거나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것이 흔히 이슬람 최초의 ‘지하드’로 전해진다.

이슬람적인 성전은 자신의 내적 정화(淨化)와 투쟁을 위한 개인적인 신앙차원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적으로부터 지키고 또한 발전시켜 확장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었다. 전자가 내면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후자는 외향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지하드는 이슬람식 분투(奮鬪)를 말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하드의 본래 개념에서부터 오늘날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개념까지 너무 다양하다. 그들의 경전(經典)인 꾸란 9장5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伏兵)하라.”

그리고 꾸란 3장 169~171절에는 “알라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알라의 양식을 먹으며 알라 곁에 살아 있느니라. 그들은 알라가 주신 은혜 가운데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들 뒤에 올 그들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의 그들에게 두려움도 없으며 슬픔도 없느니라. 그들은 기뻐하리니 알라의 은총과 박애(博愛)가 그것이로다. 알라는 믿는 자들의 보상을 삭감치 않으시리라.”

이슬람의 지하드론에서 이러한 형태의 전쟁은 신(神)의 길에서 이슬람을 위한 일종의 헌신으로 신성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이슬람에서는 신성한 전쟁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 중 전사자들을 위한 계시가 임하자 지하드는 단순한 전쟁을 넘어 非무슬림들을 향한 알라의 심판이고, 무슬림들의 구원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이슬람 법학자들이 성전 지하드를 대상에 따라 분류하여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제시한 것이 있다.

첫째, 다신교 신자들에 대한 지하드다.

유일신을 믿지 않는 다신교 신자들은 처음부터 완강하게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반대하고 박해를 가하므로 그들과는 성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둘째, 배신자들에 대한 지하드다.

이슬람 영역을 벗어나 전쟁 영역에 들어간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돌아올 것을 권유하되 응하지 않으면 성전을 하고 전쟁 영역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셋째,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하드다.

의견을 달리한다 해도 이슬람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성전을 하지 말고 이슬람영역에서 살도록 한다. 그러나 ‘이맘’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슬람법을 어긴다면 성전을 해야 한다.

넷째, 도망자나 도적에 대한 지하드다.

이들에 대한 처벌 형태는 사형에 처하거나 징역살이를 시켜야 하고, 대부분 추방한다.

다섯째, 피(被) 보호민에 대한 지하드다.

피정복지에서 이슬람에 개종하지 않고 인두세(지즈야)를 내며 자신들의 신앙과 법을 지켜나가는 피 보호민들이 규정된 인두세(人頭稅)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 다신교 신자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여 성전을 벌인다.

지하드를 위해 싸우는 전사(戰士)들인 ‘무자히드’는 전사하면 순교자로 추서되어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믿음에 따라, 지하드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앙을 정화하고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자신들의 신념에 반한다고 무자비하게 테러를 하고 눈뜨고 볼 수 없는 처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며칠 전에는 나이 어린 IS대원이 탈출을 권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처형했다.

극하면 변하는 것이 우주의 진리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악은 상극의 인연을 불러오고, 선은 상생인연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폭력으로는 평화를 불러 올 수 없다. 이제 지하드를 가장한 IS의 테러는 멈출 때가 왔다. 아마도 더 이상 테러를 고집하면 비극의 지하드는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