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불청객 호흡부전①] 이만섭 전 국회의장 ‘연명치료’ 거부, 진통제 투약도 안 받아

[아시아엔 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지난 달 거산(巨山) 김영삼(金泳三) 前 대통령의 서거(11월 22일)에 이어 이 달에는 청강(靑江) 이만섭(李萬燮) 前 국회의장이 별세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지난 12월 14일 오후 4시31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부전(呼吸不全)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큰 산’과 ‘푸른 강’이 우리 곁을 떠났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대학 재학 당시인 1954년 서울 아현동본당에서 세례(세례명 요셉)를 받았다. 2001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 국회의장이던 고인을 직접 만나 사형제도 폐지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고인의 가톨릭 장례미사는 지난 12월 17일 오전 10시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봉헌되었다.

12월 18일 국회장(國會葬)으로 치려진 영결식에는 400석이 넘는 좌석이 모자라 일부 추모객들은 1시간 동안 서서 지켜보았다. 국회의사당에는 “謹弔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서거를 삼가 애도합니다”라는 글귀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으며, 유택(幽宅)은 국립대전현충원이다.

1932년 2월 일제(日帝) 강점기 시대에 대구에서 태어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대구 대륜중학교 졸업 후 1950년 초 연희대학(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북한의 6ㆍ25남침전쟁 발발 후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하지만 임관을 앞두고 발생한 학내 다툼에 생도회장으로 책임을 지고 퇴교한 뒤 연희대로 돌아갔다. 이만섭 전 의장은 대학 졸업 후 동화통신과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그리고 주일 특파원과 주미 특파원 등으로 활약했다.

이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에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호감을 갖게 된 뒤 아내와 상의를 거쳐 정치 입문을 결심하고 곧장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나의 정치적 스승이었다”고 적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31세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그 후 대구에서 제7대와 10대는 공화당 후보로, 제11-12대는 한국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제14ㆍ15ㆍ16대는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8선(選) 국회의원으로 지냈다. 제14대 전반기(1993-1994)와 16대 전반기(2000-2002)에 국회의장(The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을 역임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고인은 국회에서 ‘날치기’를 용납하지 않는 소신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통합 선거법 등의 강행처리를 거부해 국회의장에서 밀려나 단명으로 끝난 일도 있다. “사랑과 정치는 계산하면 안 된다” “정치는 꾀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며 오직 국민만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등 후배 정치인들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우리나라 의회 정치의 산 증인이었다.

“국회와 정치인들의 행동에 정치 원로로서 국민 보기가 부끄럽다” “19대 국회에선 일은 제대로 못하고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외출할 때 선글라스를 자주 썼다고 한다. 또한 별세 직전까지 TV 출연 등을 통하여 후배 정치인들에게 ‘쓴 소리’를 계속했다. 권력과 돈 앞에 비루하지 않았던 의회 정치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분명한 판단과 처신을 높이 평가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올해 봄 폐렴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병치레가 잦았으며, 별세 40일 전에도 다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는 동안 “쓸데없는 연명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하고 실제로 진통제 투약까지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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