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40년 녹번동 건강지킴이 금강약국 윤홍중 약사···서울대장학금 8억 쾌척하고 부인 곁으로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그는 이 세상 살면서 근면 성실 검소 절약을 늘 실천하고, 자신의 성정을 닮고 존경하는 삼남매를 남겼다. 그는 평생 누구에게 “무얼 이렇게 하라” 하기보다 스스로 본을 보여주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올초 평생 모은 재산의 1/4에 해당하는 8억원을 서울대동창회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해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1970년 봄, 금강약국을 열며 35년간?아픈 이들의 벗이 돼주었다. 그는 4일 오후 2시30분 8순을 꼭 3주 앞두고 삶을 마감하고 7일 오후 6년 4개월전 먼저 보낸 부인 곁에 눕는다.
‘바른생활’로 교과서적인 삶을 살아온 윤홍중(79) 약사 이야기다.
윤 약사는 1936년 12월25일 충남 천원군 풍세면 가송리 361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윤최병)이 돌아가셔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가난은 그와 모친에게 하루도 떠날 날이 없었다. 천안농고를 졸업하고 달랑 입학금만 들고 1955년 서울대 약대(13회)에 입학했다.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하며 1959년 약대를 졸업했다.?해군에 입대해 약제관으로 근무하다 1970년 소령 예편했다.
윤 약사는 1961년 결혼한 부인(이상임)과 신혼 무렵부터 살아온 녹번동에 제대하던?봄 금강약국을 열었다. 윤 약사는 ‘금강’이란 단어를 무척 좋아했다. 다이아몬드의 변하지 않는 성질과, 분단된 조국이 통일 돼 금강산에 가고 싶다는 말을 평소 자주 했다고 한다. 금강약국은 의약분업 실시 전엔 명절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일년 열두달 하루도 문이 닫히지 않았다. 금강약국과 윤홍중 약사는 녹번동 주민들의 건강지킴이였다.
윤 약사는 슬하에 중학교 영어교사인 큰딸 숙희(53), 내과의사 아들 인재(51) 그리고 애니메이터로 근무하다 전업주부로 돌아온 막내딸 경희(48)씨를 두었고?은행지점장으로 은퇴한 최윤근(54)와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는?남태우(54) 두 사위와 약사 김문정(46) 며느리가 있다. 이들은 교육계와 의약계, 법조계, 금융계, 예능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윤 약사는?또 손녀 5명의 손자 1명을 두어 다복한 가정의 큰 어른으로서 구심점이 되어 왔다.
윤 약사는 약국 안 쪽방에서 삼남매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영어를 가르쳤다. 이는 두 딸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윤 약사는 지난해 10월 혈액암(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입원하면서도 젊어서부터 하던 대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외국어를 배워야 세상 돌아가는 걸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자녀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그는 액자에 담긴 가훈은 달지 않았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으로 일관했다. 윤 약사는 또 철저한 시간 관리와 정직성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정직하지 못하면 신용을 잃고 신용을 잃는 것은 가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2년 전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삼남매와 서울대동창회 장학금으로 1/4씩 남기기로 하고 공증을 했다. 자녀들도 윤 약사의 장학금 기부 결심에 대환영이었다. 그러던 중 작년 10월 윤 약사에게 혈액암이란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 약사 생각은 진일보하였다. ‘죽기 전에 장학금을 내는 게 낫겠다. 자식들도 내 뜻을 이해해 주니 너무 고맙기만 하다. 서울대장학금은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미리 내는 게 맞겠다.’
그리고 올 초 서울대동창회에 장학금 8억원을 기부했다. 조건은 한가지뿐. “내가 졸업한 약대생과 나라가 발전하려면 과학이 중요하니 공대생들에게 주기 바란다.”
이에 따라 자신과 부인의 성을 딴 ‘윤이금강장학회’ 명의로 공대 3년 이상훈, 약대 3년 유정윤 등 9명의 후배들이 지난 8월 말 윤 약사의 첫 장학금을 받았다. 매년 10명 안팎의 후배들이 윤 약사 장학금을 받게 된다. 이날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수여식에 참석한 그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먼저 간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홀가분한 마음과 자신처럼 어렵사리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보탬을 주게 됐다는 뿌듯함에서였을 터다.
서울대총동창회(회장 서정화)는 윤 약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장례절차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동창회 박승희 사무총장은 “윤 선생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숨기면서 거액을 내주신 분은 좀처럼 뵙지 못했다”며 “고인의 뜻에 맞게 소중하게 장학기금을 운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5일 빈소에는 윤 약사의 초중고교와 대학시절, 그리고 해군 장교 시절 친구와 선후배 100여명이 조문했다. 특히 1999년 의약분업 실시 초기 복잡해진 처방전 등의 전산입력을 위해 6개월여 함께 일한 곽창애(44)씨가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나주에서 상경해 윤 약사 영정을 바라보며 오열했다. 평소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살아온 윤 약사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 윤홍중 약사의 빈소는 서울강남성모병원 1호실이며 발인은 7일 오전 6시다. 유해는 천안 선영의 아내 곁에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