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소통·원칙·확신·개혁의 리더십, 신건 전 국정원장을 추모하며

신건 전 국정원장의 빈소
신건 전 국정원장의 빈소 <사진=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신건 원장님!

어젯밤 원장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황망하고 송구했는지 모릅니다. 이틀 전인 지난 22일 안광복 실장한테서 편치 않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회복을 기원하는 글을 쓰려던 차에 돌아가셨다는 황 비서의 문자는 이랬습니다.

“신건원장님께서 11월24일18시숙환으로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빈소:서울아산병원 20호실 발인:11월28일 07시 장례미사:논현2동성당 9시 장지:남양주시 소화묘원 연락처:02)3010-2631 010-6222-2360”

어느 새 제 생각은 원장님과의 지난 25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깊은 추억들이 있었더군요. 딱 4번의 만남이었지요. 1990년 여름, 2002년 봄, 2011년 10월, 그리고 2013년 11월28일. 첫 만남은 한겨레신문 기자와 법무부 교정국장으로 저녁식사를, 마지막은 시민으로 돌아와 점심을, 2002년엔 두 번째는 한국기자협회장과 국정원장으로 국정원장실에서 차를 나눴고, 2011년엔 국회에서 우연히 뵈었지요.

그리고 어젯밤 원장님 빈소가 차려지기를 기다리며 원장님 성함을 검색해보니 저와 몇 차례의 문자를 주고 받은 게 남아있더군요.

“원장님 교정의날 생각 나 전화드립니다. 한국교정사의 큰 획을 그으셨죠! 이상기 배”(2013.10.28)

“원장님 21일 목요일 안광복 실장, 문학진 의원 점심 확정입니다. 건안 기원합니다. 이상기 배”(2013.11.2)

“감사합니다. 그런데 21일은 제가 선약이 있어 28, 29일로 변경해 주실 수 없을까요?”(2013.11.2)

불과 4번의 만남, 3~4번의 문자메시지가 고작인데도 제게 신건(辛建)이란 이름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교정국장 시절 만남에서였습니다. “이상기 기자, 당신이 교도소 문제 지적하는 기사 종종 써줘 고맙소. 덕분에 많이 고쳤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기사가 나오면 참고해서 개선토록 하리다.” 당시 저는 민가협을 출입하면서 교도소 내 재소자 처우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사를 쓰곤 했었지요. 당연히 교도행정에 대한 비판기사였는데, 원장님께선 이를 바탕으로 교도소 문제의 개선에 활용했다고 하니 참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재소자들의 신문구독 허용, 저녁식사 시간 조정, 면회 제도 개선 등 수십년 내려온 악습이나 제도들을 대폭 개선하셨던 거죠. 특히 재소자 문제에 대한 해결은 교도관들의 처우개선과 맞물려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원장님께서 하신 일들은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울산교도소장을 지낸 윤종우씨 등이 뒷날 제게 전해주더군요. 교도관들의 맞교대를 3교대로 바꾼 게 바로 그것이었지요.

교도소 문제를 개선하신 얘기는 내일신문사 장명국 사장이 2011년 9월 낸 <밥 일 꿈>이란 책 45~46쪽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필자는 1990년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중 대학생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략) 옆방에 선고 받은 지 10년이 지난 사형수가 있어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도 듣고, 경제사범들의 억울한 이야기도 들었다. 교도관들의 어려운 생활도 알게 되었다. 당시 교도관들은 박봉에 야간근무수당도 못 받고 12시간 맞교대를 하고 있었다. 필자가 노동법 해설의 저자여서인지 근로기준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했다. 나중에 신건 교정국장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어 교도관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존경하는 신건 원장님.

어젯밤 빈소에 가니 벌써 국정원 차장과 원장 시절 비서실장 등 과거 함께 한 동료들이 여럿 와 있더군요. 별세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고 하더군요. 국정원 시절 원장님이 어떻게 하셨을까를 미뤄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하지만 원장님께는 국정원장 시절의 일로 10개월여 감옥생활을 하신,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이 또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듣고 취재한 바로는 이렇더군요.

원장님께서 사법처리를 받은 것은 국정원 불법사찰 혐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이렇게 제게 파악됐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원장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는데,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들을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김대중 정부 후기 신건 원장 취임 초기 당시까지 해오던 불법도청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신건 원장은 불법도청장치를 모두 수거해 용광로에 집어넣어 없애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신 원장 시절 불법도청은 없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 불법도청이 문제되면서 재판정에 신 원장이 서게 됐다. 신 원장은 이같은 과정과 사정을 설명하고 ‘국가안보상 대북 및 해외 관련 도청은 했지만 정치나 언론사찰은 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실형을 선고했다. 나중에 집행유예로 석방됐지만, 전임자들의 불법행위를 없앤 자신이 실형을 선고받은데 대해 몹시 마음 상해 했다.”

또 한가지 국정원장 재직시절 원장님이 하신 중요한 일이 있더군요. 바로 직원들 사기를 크게 올려주셨더군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원훈대로 국정원 직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퇴직 후 대부분 직원들이 전관예우는커녕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요. 아니 그걸 되레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저는 보고 듣고 믿습니다. 그러니 퇴직 후 사회부적응을 하는 분들도 종종 봤습니다. 그래서 원장님께서 하신 일이 특정직으로 있던 것을 공안직으로 바꿔 매달 20만원 정도 급여를 높여주셨더군요. 자연히 연금에도 적용돼 안정적인 근무여건이 조성됐을 거라고 봅니다.

존경하는 신건 원장님!

어제 원장님 빈소에서 만난 전직 간부가 이러더군요. “검찰 출신이지만, 아마 음지에서 일하는 국정원 직원들의 애환을 우리보다 더 걱정하고 해결해 주신 분이다. 소탈한 웃음과 화내는 법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낮은 곳까지 챙기신 큰 형님 같으신 분이셨다.”

원장님께선 법무부 교정국장과 차관 등 검찰시절, 그리고 국정원 차장, 원장 시절 ‘소통’ ‘원칙’ ‘확신’ ‘개혁’, 이 4가지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어나가셨지요. 원장님의 리더십은 지금도 국정원 직원들 가슴 속에 남아있으리라 믿습니다.

존경하는 원장님.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지난 일요일, 한달 정도밖에 사시기 어려울 것이란 얘길 듣고 쾌유를 비는 글을 쓰려던 것이 이렇게 추모글이 돼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계시던 자리마다 최선을 다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고 밝게 하시려던 그 노고에 하나님 은총과 역사의 기록이 남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원장님과 낭송하고 싶습니다. 먼길 편히 가십시오.

What is success
무엇이 성공인가

To laugh often and much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지식인에게는 존경과 아이들에게는 애정을 받는 것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정직한 비평가에게 공감 또는 찬사을 얻으며, 거짓된 친구들의 배신을 참아내는 것

To appreciate beauty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

To find the best in others
다른 이들에서 최고 좋은 면을 찾아내는 것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세상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다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조그만 정원 또는 보완된 사회환경을 만들든.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한 생명이 당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보다 편히 숨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

This is to have succeeded.
이것이 성공하는 것이다.

존경하는 신건(辛建) 원장님! 이름 그대로 맵게 제대로 세우고 한세상 멋지게 사셨습니다.

2015년 11월25일 이상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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