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 뒷담화①] ‘종기’로 승하한 정조가 프랑스 신부 제자 ‘이명래 고약’ 탄생의 원천?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아들인 정조(正祖, 1752-1800)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대한제국 추존황제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세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 영조(英祖, 1694-1776)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王統)을 계승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국왕으로 재위했다.
정조는 자주 등에 생긴 종기(腫氣) 때문에 고생을 했으나, 어의(御醫)가 약을 처방하면 낫곤 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잦은 격무(激務)와 과로(過勞)로 정조의 종기는 점점 더 심해져 피고름이 쏟아지고 통증과 발열이 멈추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땀띠와도 같은 발진이 생겼다.
좌의정 심환지와 우의정 이시수의 지휘 아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자 수은(水銀) 증기를 쐬는 연훈방(煙薰方)을 받기로 하였다.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으나, 병세는 점차 위중해졌다. 정조는 음력 6월 초 등에 종기가 생긴 지 24일 만인 1800년 6월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9세, 왕위에 오른 지 24년째 되던 해다.
종기(furuncle)란 모낭(毛囊)에서 발생한 염증성 결절을 말한다. 모낭이 세균에 감염되어 고름이 잡히면 모낭염(毛囊炎, folliculitis)이라고 하며, 모낭염이 심해지고 커져서 결절이 생긴 것을 종기라고 한다. 종기가 더 심해지면 고름집(膿瘍, abscess)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여러 개의 종기가 융합해서 염증성 병변이 커지고 깊어진 것을 큰 종기(carbuncle)라고 한다.
큰 종기가 심할 경우에는 발열과 같은 전신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종기는 주로 얼굴, 목, 겨드랑이, 엉덩이, 허벅지 등에 잘 생기며, 당뇨, 비만, 면역결핍 질환, 만성 포도알균 보균자, 불결한 위생상태 등에서 더 잘 생긴다.
한방에서는 몸에 생긴 종기를 옹저(癰疽)라고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옹저’ 문(門)에서는 종기가 생기는 원인, 종류, 치료법 등을 다루고 있다. 종기의 치료법에는 내과적 처치, 고약 붙이기, 침을 써서 종기를 째는 외과적 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옹저는 기(氣)가 혈(血)과 함께 잘 돌지 못하고 경락에 머무르면서 막히고 뭉쳐서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명래 고약’(李明來 膏藥)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이 종기 치료에 주로 사용하던 가정상비약이었다. 이명래 고약은 사람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한 국내 최초의 상표로 기록돼 있다. 광복과 북한의 6ㆍ25남침전쟁 등 사회적 혼란 속에 가난 극복이 최대 이슈였던 1950-60년대, 서민들은 간단한 의약품 하나를 구입하는 데도 큰 힘이 들었다.
이명래 고약은 현재 우리나라 장년층 이상은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후로 한동안 잊힌 듯하다가 기름종이를 사용하던 것보다 편리한 밴드형으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남는 단점, 종기나 화농을 치료하는 다양한 신약이 개발되어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품이 되었다.
이명래(세계명 요한, 1890-1952)는 조선 말기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이명래는 성당에서 심부름을 하며 프랑스인 신부에게 약 조제법과 치료법을 배우며 자랐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충남 아산시 이원면 공세리 성당 드비즈 프랑스인 신부도 한문과 라틴어가 병기된 한방의약서를 지닌 채 치료와 선교를 병행했다.
이명래는 신부로부터 물려받은 한방 의서를 바탕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어 ‘이명래 고약’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16세에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했다. 이명래가 만든 고약은 한방 생약(황, 황단, 유비, 유향, 창출, 청피, 금은화, 도인, 목향 등) 10여 가지를 주성분으로 하여 만들었다. 한지에 싸여있는 고약을 불에 녹여 환부(患部)에 붙이면 고약 안에 박혀있는 콩알모양의 ‘발근고’가 농을 빨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