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현대사 6대 사건 ⑥] ‘논란의 중심’ 일본헌법 9조 개정될까?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아시아엔=선우정 조선일보 국제부장, 전 도쿄특파원] 독일 51번, 스위스 140번, 멕시코 408번…. 각국이 헌법을 고친 횟수다. 한국도 1948년 공포 이래 헌법을 9번 고쳤다. 길지 않은 역사를 감안하면 낮은 빈도가 아니다. 1788년 발효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헌법인 미국헌법은 지금까지 18번 개정됐다. 성경, 불경, 논어, 맹자가 아닌 이상, 헌법은 국민동의가 있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1992년 미국은 국회의원 봉급규정을 바꾸려고 헌법에 손을 댔다.
헌법을 고친다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나라가 있다. 한국도 그런 나라에 속한다. 과거 권력자들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헌법을 자주 바꾼 탓에 누군가 “개헌”을 외치면 ‘무슨 꼼수를 부리나’ 하고 일단 실눈을 뜨고 바라본다. 하지만 일본에 비하면 한국의 ‘개헌 알레르기’는 경증에 속한다. 일본의 개헌에 대한 반응은 일본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격하다. 누군가 ‘개헌’을 외치면, 국내외 많은 이들이 도끼눈을 뜨고 바라본다.
현행 일본헌법은 1947년 시행됐다. 큰눈으로 보면 메이지유신 직후인 1890년 시행된 첫 일본헌법(대일본제국헌법)이 1947년 개정(일본국헌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행헌법은 1차개정헌법이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설명일 뿐, 일왕의 통치를 국민의 통치로 대체한 신헌법의 내용은 신시대를 연 ‘완전히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이 헌법엔 다른 나라의 현대적 헌법과도 확연히 다른, 훨씬 진보적인 부분이 담겨 있다. 제9조다. 다음과 같다.
①일본국민은,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무력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외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헌법이 ‘평화헌법’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오직 이 조항 때문이다. 전쟁포기를 명문화하는 경우는 몇몇 나라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쟁포기는 물론 군대까지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을 헌법에 못박은 경우는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유토피아적 헌법’이란 평가도 받는다. 쉽게 생각하면 전쟁에서 진 댓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같은 패전국인 독일 헌법을 보면 판단이 달라진다. 비슷한 시기에 패전한 독일은 1949년 시행된 헌법에 군대보유는 물론, 징병의무까지 규정하고 있다. 나쁜 짓으로 따지면 독일이 일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한 것은 없다. 두 헌법 모두 당시 두나라를 지배하던 승전국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도 같다. 그런데 왜 일본헌법에만 이런 조항이 생겼을까? 왜 일본에만 이런 족쇄를 채웠을까?
일본헌법은 1947년, 독일헌법은 1949년 성립됐다.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차는 매우 중요하다. 현대 세계사는 동서냉전의 출발점을 소련에 의한 ‘베를린봉쇄’로 기록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두 헌법 탄생의 가운데 해인 1948년이었다. 냉전 이전과 냉전 이후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미국의 안보 전략은 큰 변화를 겪는다. 냉전 이전 미국의 전략은 일본과 독일을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후진농업국가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 이후 미국의 전략변화는 일본과 독일의 위상을 공산주의 확대를 막는 전초기지로 탈바꿈시켰다. 시차를 보면 알 수 있듯 일본헌법은 냉전 이전의 미국안보 전략, 독일헌법은 냉전 이후의 미국안보 전략을 전폭적으로 반영했다. 만약 미국이 일본헌법제정을 1~2년 미적거렸다면 9조와 같은 조항은 태어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은 동서냉전이 한국의 6.25 전쟁으로 폭발하자 일본에 개헌을 요구한 일이 있다. 일본도 피를 흘려달라는 주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때 일본정부는 야당인 사회당과 손을 잡고 미국요구에 반대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특수의 과실만 따먹자는 전략이었다. 16개 참전국이 한반도에서 피를 흘리는 동안 일본은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면서 상전벽해에 성공했다.
1952년 강화조약에 따른 일본의 독립 이후 미국은 개헌요구를 직설적으로 한 적이 없다. 주변국의 우려를 고려해야 했고, 게다가 개헌요구 자체가 내정간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준히, 강력하게 동맹국 일본의 안보분담을 요구해 왔다. 이런 요구를 순풍으로 삼아 일본은 국내외 위헌논란과 군국주의 회귀논란에 시달리면서도, 군대에 다름 아닌 자위대를 창설해 군비를 확장하고, 해외파병까지 실현했다. 하지만 일본의 무력 행사 범위는 자국 방위에 국한됐다. 해외 파병은 전투가 아닌 평화 활동 목적에 국한됐다.
아베 정부가 한 것처럼 헌법 해석을 바꾼다고 해도 일본이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후방 지원일 뿐이다. 예를 들어 미국과 함께 폼 나게 대테러 전쟁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 군사행위는 여전히 평화헌법의 허들에 가로막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이 다른 내용의 헌법을 갖게된 이유가 단지 시차문제라면 냉전 이후 일본 헌법은 쉽게 개정됐을 것이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도 반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대와 교전권은 독립국가의 권리이고 한국, 중국도 독일처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개헌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일본 국민들도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왜 일본만 이런가?
헌법 9조는 과거사문제와 관련이 있다. ‘패전’ 자체가 아니라 ‘패전 처리를 어떻게 했는가’ 하는 전후 청산과 관련이 깊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독일은 나치의 전쟁역사와 분명한 선을 그었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세력을 전쟁 이후 쓸어버렸고, 아우슈비츠의 경비원까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법정에 세우고 있다. 하지만 패전국 일본은 독일과 여러 측면에서 다른 나라였다.
독일과 달리 전쟁 책임자를 헌신짝처럼 내칠 수 없었던 것은 그 정점에 일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란 국가가 일왕의 혈통과 함께 시작돼 일왕의 혈통과 함께 끝난다는 신화를 종교처럼 배웠다. 일왕을 ‘현인신(살아있는 신)’으로 섬겼다. 멍청했지만 그것은 미국이 본 전후 일본의 현실이었다.
미국은 이런 존재를 단숨에 제거하는 일이 점령 정책에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인간선언’을 통해 ‘현인신’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정도로 일왕 단죄를 중단해야 했다. 엄청난 모순이었다.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일왕을 대체할 군지휘권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도쿄전범재판은 주범을 빼고 종범만 단죄한 미완의 재판이었다. 즉 불의의 재판이었다.
당연히 다른 승전국의 반발이 뒤따랐다. ‘괴벨스도, 아이히만도 죽였는데 히틀러만 살린 것과 뭐가 다른가. 게다가 지위까지 유지한다고? 다시 전쟁을 하라는 건가?’ 미국은 이런 격한 반발과 우려를 억누를 획기적 답을 고안했다. 그 답이 바로 ‘세상에 없던’ 9조였다. ‘괜찮아. 족쇄를 채웠잖아.’ 이런 논리였을 것이다.
헌법 9조는 불완전한 과거청산의 산물이다. 재발할 수 있는 ‘군국주의 바이러스’를 법적 장치를 통해 막으려 한 것이 9조라고 볼 수 있다. 이 법적 장치가 사라지면 결국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달려갈까. 법적 장치로 전후 70년 동안 억제했으니 군국주의 바이러스는 이미 일본 몸 속에서 사멸했을까. 지금 일본은 역사의 봉인을 조금씩 뜯어내면서 자신의 몸 속을 살피고 있다.
일본의 주류들은 일본헌법을 독립 후 반드시 고쳐야 하는 ‘종속적 헌법’으로 규정했다. ‘자주헌법’을 향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6.25전쟁의 막대한 특수를 다 뽑아 먹은 뒤였다. 1955년 양대 보수정당이 자민당 간판으로 합당한 이유는 첫째가 사회당(사회주의) 견제, 둘째가 개헌이었다. 자민당강령의 첫머리엔 신 헌법제정, 즉 개헌실현이 자리한다. 물론 자민당의 개헌타깃은 9조를 개정해 ‘전쟁의 영구 방기’라는 족쇄를 영구히 푸는 것이다.
자민당은 길지 않은 두 기간을 제외하곤 거대정당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독재국가에 버금가는 장기집권이다. 그럼에도 개헌은 성공하지 못했다. 개헌에 필요한 중참(상하) 양원의 3분의 2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탓이 다. 1980년대까지 일본 국민은 좌파정당인 사회당에 견제역할을 맡겼고, 사회당이 쇠퇴한 이후엔 온건 보수야당에 견제역할을 맡겼다. 물론 헌법수호만을 위해 자민당을 견제한 것은 아니지만, 평화주의를 상징하는 헌법 9조는 자민당 견제의 핵심 키워드였고 지금도 그렇다.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국민의 일관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3월23일 발표한 조사를 보면 개헌찬성이 51%, 반대가 46%다. 반수 이상이 개헌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민당이 노리는 개헌의 핵심 9조를 바꾸는 것에 찬성하는 여론은 35%에 불과하다. 국민 40%는 9조를 유지하는 대신 해석변경을 통해 시대변화에 대응하자는 의견을 갖고 있고, 20%는 9조 개정은 물론 해석을 통한 현상변경에도 반대한다.
환경권, 프라이버시권 등 제헌 이후 생겨난 새로운 권리개념을 집어넣는 개헌엔 국민 반수이상이 찬성하지만, 자민당이 바라는 9조 개정엔 그보다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평화헌법(9조) 개정에 대해 국민
60%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언론사의 여론조사 역시 ‘개헌찬성, 그러나 9조개정반대’ 흐름이 나타난다. 9조 개정을 바꾸려는 일본 주류의 힘을 국민의 힘이 가로막는 역사가 70년 가까이 이어진 것이다.
패권과 패권이 충돌하는 동북아, 그 중에서도 무력을 숭상했던 나라의 국민들이 유토피아적 헌법을 지켜온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아베시대 들어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그런 측면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의 콘센서스는 여전히 평화주의에 있다는 것을 위의 여론조사가 증명한다.
현대 세계에서 평화의 결실을 가장 진하게 맛본 국민을 꼽는다면 어느 국민일까. 생각해 보면 전후 70년 동안 고도의 평화와 고도의 번영을 동시에 누린 곳은 세계에서 서유럽과 일본 밖에 없다. 그런 국민이 핵폭탄을 불러들인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받아들일까? 고도의 번영을 가져온 평화주의를 헌신짝처럼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의 헌법 9조는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버틸 것이다.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의견으로, 본지 및 동 기획보도 협찬 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의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