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현대사 6대 사건 ①] 한일수교 50년-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아시아엔=김국헌 군사학박사] 한일수교는 한중수교와 비교될 수 있다. 중국은 6.25전쟁에 개입하여 종전에 다다랐던 통일을 가로막은 침략자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를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 대다수는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중국의 침략은 동북공정이라는 방식으로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일들을 문제 삼고 해결을 구하려고 하였다면, 한중수교는 그렇게 단시일에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50년 전의 한일수교는 여러 문제가 풀려서가 아니라, 풀리지 않은 문제가 많았음에도 이루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일본이 한국 산업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포항제철처럼 그러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일본을 기사회생시켰다. 한국이 스탈린의 침략을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희생이 없었으면, 오늘의 일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냥 가정이 아니다. 북한군이 대마도해협을 넘어와서가 아니다. 종전 당시 일본사회의 사회주의 경향은 심각하였다. 한국전쟁의 덕을 입은 신무(神武) 이래의 특수로 일본은 사회주의 창궐을 잠재우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재생하였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과 일본은 수천년을 두고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살아왔다. 이는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변할 수 없는 숙명이다. 한국과 일본의 모든 문제는 이 불변의 명제를 전제로 해결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해(Rapprochement)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대화해란 당분간은 독일이 통일되기 전 미테랑과 콜에 의한 독일과 프랑스의 진정어린 대화해가 아니라, 1차대전 전 영국과 프랑스의 전략적 연대(Entente)를 기대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놀랍게도 독일과의 전운이 익어가던 때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은밀하게 각각 상대에 대한 작전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1914년 독일군이 쉴리펜 플랜에 의해 벨기에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자 영국은 곧 바로 영국 원정군(BEF- British Expeditionary Force)을 파견하여 이후 4년간 수백만의 정영(精英)을 묻게 되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는 월드컵 축구를 제외하고는 친구다. 과거 영어를 일부러 모른 체하던 프랑스인들이 이제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는 책이 나왔다. 앞부분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뒷 부분은 절반만 맞는 것 같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독립선언문을 읽어본 일본의 지도층은 “이러한 사상과 문장을 가진 한국인을 노예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라고 우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인식에서 거의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의식이 변화되는 것이 먼저고, 필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술이 익기 위해서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과 같다. 한국은 일본을 알기 위해 좀더 노력해야겠지만, 일본도 한국을 정확히 알기 위해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일본에는 전쟁 이전의 일본을 아는 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는 군국일본을 거의 모른다. 경험하지 않고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해봤자 만사휴의(萬事休矣)다.
독도는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중학교 교과서와 외교청서에 보란 듯이 도발하고 있는 일본이다. 사태는 풀려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다. 50년 전 한일이 수교할 때 박정희는 주은래 못지않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스프레트리 제도-서남군도, 센가쿠 열도-를 둘러싸고 주은래는 “이 문제는 우리 후손들이 더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니 시간에 맡기자”고 넘어갔다.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정희의 마음 속에는 이런 의식이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료가 새록새록 발굴되었다. 그것도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내어놓았다. 이제 여기에 맞추어 한일간의 미해결 문제에 대한 답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문제는 오늘, 그리고 미래의 일본인들이 이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들의 심저에는 명치시대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탈아론(脫亞論)이 잠재해 있다. 머리가 아픈 한국이나 중국과 유리되어 심정적으로 유럽이나 미국과 연대하여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라는 숙명은 변하지 않는다. 한일 간에 해저터널이 건설되면 양국 간 간극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층 간에는 이런 참신한 노력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한다. 마치 전라도와 경상도가 KTX로 연계되어 여행해보면 음식과 산천이 익숙해져서 친근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국과 프랑스가 해저터널로 연결된 것도 이러한 꿈을 현실화한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을 너무 모른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심중한 반성이 필요하다. 일본인은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인이 한국인에 대해 낯설게 생각하는 것이 적지 않다. 일본인은 밥과 반찬을 따로 담아 먹는다. 여럿이 같이 먹는 국에 입에 들어간 숟가락을 담는 것은 일본인은 질색이다. 이런 사소한 일부터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 사람들은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하며, 아이들의 교육도 이것이 첫째다. 그러나 개인 간에 폐는 피하려 하면서도 인근(隣近)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끼친 과거는 잊으려 하는 것은 일본인의 또 다른 면모다.
한국과 일본은 공통된 유교문화를 저변에 가지고 있다. 양국은 60여년 전에 공산화되고 50년 전 문화혁명으로 문화유산이 파괴된 중국에 비해 월등한 유교문화의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기본적으로 불교국가이다. 신도(神道)는 하나의 관습일 뿐이다. 한국에서 불교는 고려의 멸망 이래 지도이념으로서 생명을 잃은 지가 오래이나, 일본인의 심저에는 불교가 매우 깊이 자리하고 있다. 한복, 음악, 음식 등 한류도 중요하나, 한국의 불교문화를 소개하고 애호하게끔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미국과의 안보동맹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양국민은 잊지 않아야 한다. 과거에 대한 인식이 바로 잡히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나,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하지 않으면 개선된 과거도 더더욱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한국과 일본 양국 지도자들의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실용적 자세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