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이 겨울, 적산가옥 그 현관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바다 향해 나란히 서 있는 쌀 창고. 미국이 원조하는 동남아시아 쌀 안남미를 저장했다. 화물선이 들어오고 하역이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몰린다. 선착장에서 창고까지 떨어져 있는 그 쌀을 주워 바구니에 담아 간다. 한 끼 아니면 두 끼니 거리다.
창고 뒤 큰 길에 죽 늘어선 집, 대여섯 채나 될까? 오른쪽 길 건너에는 어망공장, 그 모퉁이 바로 앞에 일본식 가옥이 있다. 그 집에서도 그때 되면 양곡창고 마당으로 간다. 서른이 채 안된 어머니가 나간다. 바닥에 떨어진 쌀을 싸리비로 쓸어 담는다. 배 들어오는 게 뜸해진다. 언제 오나 기다리며 부둣가 석축에 늘어앉는다.
그 일본 집은 뜰이 넓고 석류나무가 있었다. 추위 잘 탄다는 등자나무도 있고 사철 꽃과 풀이 피었다. 적(일본)이 소유했었다는 적산가옥은 대문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면 툇마루는 있지만 현관은 없다. 현관이 있으면 단점도 있었다. 여닫는 소리가 났다. 몰래 나가려 해도 그게 안됐다.
드나들 때마다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하곤 했다. 나돌아다는 거 눈치 채이곤 하는 체크포인트여서가 아니다. 뭔가 의미 있는 곳을 통과하는 듯해서였다. 드나들기만 하는 단순한 출입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 느낌 뭔가?
한달 전 장항에 갔다 왔는데 준모형 전화가 왔다. 언제 올 거야, 김 청장? 그 목소리에 배기지 못해 또 갔다. 또 탐험한다. 옆집 지붕은 내려앉았다. 폐허다. 적산가옥 창문은 비닐로 가렸다. 차가운 겨울 바다바람이 막아지려나. 그 문패는 여전했다. 순간 깨달았다. 현묘(玄妙)한 도리(道理)의 세계는 바로 가정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 그래서 ‘현’‘관’이다. 밖에서 지내다 귀의하는 지점. 몸을 의지하기 위하여 통과하는 곳. 거길 지나면 우리가족. 내 식구가 기다린다.
옛날에는 걸어서 1시간 가량, 요즘에야 차로 한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그 집. 마을 저 안 깊숙이 앉아있는 한옥이다. 현관은 없다. 대문 들어서면 왼쪽에 사랑채 두 칸, 그 사이에 문이 있고 저 안에 본채가 있다. 손님은 앞문으로 들어와 마루에 앉았다. 동네 사람은 집 뒤 쪽문을 이용하곤 했다.
오늘날에야 도어록, 현관, 부엌, 싱크대, 수세식 화장실은 기본 사양이다.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는다. 마루에 올라서 거실로 간다. 주인에게나 손님에게나 마음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나가면서 가슴에 넣어가는 정, 들어오면서 꺼내놓는다.
적산가옥 살 때 엄마가 자주 부른 노래가 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따라 불렀다. 국민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다 외웠다. 아버지가 서울 가 계셨다. 몇달 만에 오시곤 하셨다. 엄마 치마저고리감이랑 흰 고무신, 내 벙어리 운동화 사오셨다. 한 이틀 머물다 장항선 타고 또 가셨다. 천안에서 경부선 갈아타신다고 했다. 매번 따라나서곤 했다. 역 가는 길 한편이 숲길 꽃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