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거장 모흐센 특별기고] “할머니가 내 영화의 스승”
<아시아엔>을 통해 소개된 바 있는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는 이란이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다. 마흐말바프 감독이 유년기의 가난, 5년의 수감생활, 조국 이란 정부로부터의 위협 등 모진 풍파를 견뎌내고 세상을 바꾼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영화관을 특별기고했다.
[아시아엔=모흐센 마흐말바프 이란 영화감독] 나는 조모의 가르침 아래 자랐다. 할머니는 매우 다정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었다. 그녀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이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었다. 나는 그 뜻에 따라 유년 시절 내내 극장에 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런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이는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 유년시절에는 극장에서 할리우드나 발리우드영화만 상영했다. 당시에는 독립영화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지금도 그때 영화관을 가지 않아서 잃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어른이 되고 나서 영화를 처음 접하니 다른 관객들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맹인으로 태어나, 어른이 된 후에야 빛과 색을 볼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셋째, 어렸을 적 영화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까닭에, 훗날 영화를 제작할 때 나만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순수한 마음과 머리로 영화를 제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나는 전체주의 국가 이란의 매우 빈곤한 지역에서 살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빵과 같은 간단한 먹을거리나 따뜻하게 몸을 데울 것을 찾는게 중요한 일과였다. 우리 가족의 빈곤이란 내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가족이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해 일해야만 했음을 의미했다. 덕분에 나는 17살이 되기 전까지 13가지에 달하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15살이 되던 해, 나는 이란 독재정치에 항거해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7살 때 체포당했다. 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만 18세가 안됐기 때문에 내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5년형으로 바뀌었다. (이란에선 만 18세가 돼야 사형집행을 할 수 있다-편집자) 옥중생활은 작가로서, 그리고 영화제작자로서 굶주림과 독재에 시달린 사람들을 조명하고 표현하는데 도움이 됐다.
비록 나는 대학 진학은 커녕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했지만, 내 삶의 가장 기쁨은 ‘독서’였다. 나는 형무소에서 약 2000권을 읽었다. 역사, 문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자연과학, 수학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석방 이후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영화를 시작한 것도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지금도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다량의 독서를 통해 익힌 작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란 정부는 작가들을 검열하고 구속했으며, 망명을 보내거나 모국을 떠나도록 압박했다. 나는 극심한 탄압과 검열로 10년 전 조국을 떠났다. 이란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나를 죽이려 했다. 그들은 지난 수년간 여러 차례 테러리스트와 암살자를 보내 나를 죽이려 했고, 심지어 촬영장 카메라 앞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명이 죽고 스무명이 부상을 입었다.
필자는 이란의 위협을 피해서 주거지 뿐만아니라 작업장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지금까지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터키, 타지키스탄, 조지아, 이스라엘, 한국, 이탈리아, 영국 등 10개 이상의 국가에서 영화를 촬영해왔다. 여러 나라에서 촬영을 하며, 지구상의 다양한 인류들이 비슷한 아픔과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언어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전세계 사람들은 매우 비슷하다. 나는 이란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세계인’으로 여기며, 영화를 만들 때도 일본, 한국, 동양과 서양의 관객들도 이란 관객들만큼 염두에 두고 만든다.
두 딸과 아들, 아내는 이란의 전통교육이 사람의 잠재력을 일깨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내 곁을 지키며 영화제작에 상당한 검열이 뒤따르고 재정적 어려움과 정부의 압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의 가족은 창작에 대한 열정 또한 보았기 때문에 나를 지지해 주고 있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가족들에게 영화이론과 실무에 관해 알려줬다. 우리 집은 마치 영화학교 같았고, 가족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영화를 배워갔다. 현재 우리 가족 모두는 영화산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한 식구인 동시에 동일한 제작환경 속에서 일하지만, 각자의 스타일은 각양각색이다. 이는 내가 영화를 가르칠 때, 고유의 개성을 드러내도록 권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원사가 되어 우리 정원의 붉은 장미는 붉은 빛을 그대로 살리고, 하얀 백합도 백색 빛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중동에서 살아왔다. 중동은 빈곤, 문맹, 가부장제, 종교적 극단주의, 테러리즘 등으로 인해 매일의 삶이 위태로운 곳이다. 나의 가족과 나는 영화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고발하고자 했다.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작품 중에 <아프간 알파벳>(“Afghan Alphabet”: Around 700,000 Afghan children refugee live in Iran)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란에 살고 있는 70만 아프간 난민어린이들은 비자 없이 입국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사실 어린이들은 탈레반 시절, 굶주림과 죽음을 피해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이웃나라 이란으로 피난 온 것이었다. 나와 가족들은 영화를 만들어 이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카타미 정권 시절, 우리 가족은 이 영화를 이란 정부에 보여줬다. 정부는 곧바로 법을 개정해 난민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조치했다. 이로 인해 50만명이 넘는 난민 어린이들이 이란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필자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같은 경험에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만들때, 항상 반복을 피하려 노력해왔다. 매 영화마다 새로운 방법과 형식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한 해 동안 두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당시 두 영화는 매우 달랐다. <살람 시네마>(Salam Cinema)와 <가베>(Gebbeh)는 같은 해(1995)에 제작됐으나, 형식이나 주제는 확연히 달랐다. 각각의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반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창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