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브라질 월드컵] 실력은 달라도 축구에 죽고 산다
월드컵 앞둔 아시아축구 엿보기
흔히 유럽과 남미를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이라고 한다. 하지만 열기로 치면 아시아도 이에 못지 않는다. 축구에 ‘죽고 사는’ 것은 ‘축구 종가’ 잉글랜드나,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비록 자국 축구수준은 세계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만 아시아에도 축구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열정적 팬들이 너무 많다.
제19회 남아공 월드컵이 열린 지난 2010년 6월로 돌아가 보자. 서남아시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는 이 나라의 축구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황당 사건이 벌어져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명문대인 방글라데시 다카대학이 남아공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조기 종강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방학을 앞당겨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조별리그 경기 중 정전으로 텔레비전 중계가 끊기자, 다카 시민 수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폭동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일부 공장들은 전력 부족 상황을 고려해 월드컵 기간에 문을 닫기도 했다. 이 대학에서는 2006 독일 월드컵 당시에도 같은 내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 20여 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축구처럼 범지구적인 경기도 없을 것이다. 가령 야구는 미국과 도미니카공화국 등 북중미·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 일부 국가에 한정돼 있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이 총 207개가 될 정도로 축구는 전 세계적인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 축구 변방 언제 벗어나나
1930년 시작돼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오는 6월로 다가온 2014 브라질 월드컵(6월12일~7월13일)에서는 역시 유럽과 남미 팀들이 우승을 다툴 것으로 예상된다. 두 대륙의 팀들은 지난 19차례 대회 동안 우승과 준우승을 한 번도 다른 대륙한테 내준 적이 없다. 1990년대 이후 북중미와 아프리카 팀들이 간간히 8강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도 들러리에 불과했다.
아시아 팀들은 더욱 그랬다. 한국, 일본, 이란 등을 중심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줄곧 나갔으나 높은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 했다.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 때 4강 신화를 쓴 게 최고의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개최국 프리미엄을 안고 거둔 성과였다. 이번에는 ‘아시아 축구의 맹주’를 자처해온 한국을 비롯해, 아시안컵의 최강자 일본, 중동의 강호 이란, 2006년 아시아축구연맹(AFC)에 편입돼 강호로 군림해 온 호주 등 4개 나라가 출전해 관심을 모은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강호 첼시의 조제 모리뉴(51) 감독. 그는 지난 4월4일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질 월드컵 성적과 관련해 아시아 국가가 낼 수 있는 성적은 8강이 한계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에서도 4강에 오르는 나라가 나오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실적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들은 8강 정도가 한계가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모리뉴의 이런 평가가 아니더라도 아시아 국가들이 세계 축구 무대에서 유럽·남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국제축구연맹 랭킹만 보더라도 그렇다. 지난 3월13일 현재 이란이 42위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 일본 48위, 우즈베키스탄 55위, 한국 60위, 호주 63위 등이다. 이에 반해 북중미-카리브해 축구연맹(CONCACAF) 소속인 멕시코가 14위, 미국이 20위로 다소 높은 편이다.
월드컵 본선에서의 성적을 보자. 2010 남아공월드컵 때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16강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었다. 호주와 북한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16강전에서 우루과이한테 1-2로 졌고, 일본은 파라과이와 연장 접전 끝에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5로 져 고배를 마셨다.
2006 독일 월드컵 때는 한국과 일본,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무려 5팀이 출전했으나 조별리그에서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아시아 축구의 한계를 실감했다. 이와 달리 아프리카에서는 카메룬이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세네갈이 2002 한·일 월드컵, 가나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각각 8강에 오른 적이 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아시아 국가들의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8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은 16강을 넘어 8강까지 넘보고 있으나 조별리그부터 힘겨운 경기를 펼쳐야 한다. 러시아와의 H조 조별리그 1차전이 고비라 할 수 있다. 2차전에서는 아프리카의 복병 알제리, 3차전에서는 유럽의 ‘다크호스’ 벨기에와 격돌해야 한다. 조별리그를 통과하더라도 ‘가시밭길’이다. 일본은 아프리카의 강호 코트디부아르, 콜롬비아, 그리스와 C조, 호주는 스페인, 네덜란드, 칠레와 B조에서 역시 버거운 승부를 벌여야 한다. 이란은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나이지리아와 격돌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에는 잉글랜드·독일·러시아 등 유럽 프로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더러 있어 선전도 예상된다. 한국은 박주영(왓퍼드), 손흥민(바이어 레버쿠젠), 이청용(볼턴 원더러스), 구자철(마인츠), 기성용(선덜랜드) 등이 공격에 포진해 있다. 일본은 혼다 다이스케(AC밀란), 가가와 신지(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카자키 신지(마인츠05)가 있다. 호주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에버튼에서 뛰다가 미국 메이저리그축구로 이적한 35살 노장 팀 케이힐(뉴욕 레드불스)이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아시아 축구 판도를 보면 중동세의 하락이 두드러진다. 한때 이란과 함께 중동의 강호로 위력을 떨치던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축구연맹 랭킹 75위로 추락하는 등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실패했다. 이란도 예전만 못하다. 카타르(101위), 이라크(103위) 등도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자국 선수들이 부진하자 일부 국가들은 아프리카나 남미 선수들을 귀화시켜 전력 보강에 나서고 있을 정도다.
중동 하락세, 중국은 클럽축구 약진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권 국가들은 여전히 깊은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국제축구연맹 랭킹 100위 안에 든 팀이 하나도 없다. 베트남이 125위, 말레이시아 141위 등이다. 월드컵 본선에 나온 팀도 없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과 어깨를 겨루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 축구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어졌다.
아시아축구연맹은 1954년 5월8일 기존 아시아축구연합(AFA)을 확대 개편한 뒤 그해 6월21일 국제축구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현재 회원국은 46개에 이르고 있다. 6개 대륙 중 인구가 가장 많지만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는 바닥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시안컵이나 월드컵 등 국가 대항전과 달리, 클럽축구 대항전인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최근 중국 슈퍼리그 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중국의 신흥 강호 광저우 에버그란데는 지난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한국 K리그 대표구단 FC서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해 기염을 토했다. 클럽축구는 구단의 재정과 선수에 대한 투자가 성패를 좌우한다.
광저우는 인터밀란 등 세계적 명문 클럽을 지도했던 이탈리아 출신 명장 마르첼로 리피 감독을 비롯해 특급스타들을 영입해 아시아 정상에 섰다. 2010년 헝다 부동산그룹이 클럽을 인수한 이후 막대한 자금력으로 신흥 강호로 떠오른 것이다. 광저우가 나서자 다른 중국 구단들도 움직이고 있다. 올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광저우, 귀주 런허 등 중국 팀들이 한국과 일본 팀들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4년 동안 챔피언스리그에서는 K리그 팀들의 초강세였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2009년 포항 스틸러스, 2010년 성남 일화, 2012년 울산 현대 등이 세 차례나 우승트로피를 차지했다. 2011년에만 전북 현대가 카타르 알사드의 ‘침대축구’에 휘말려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그러나 이젠 중동세가 아닌 중국세가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