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5만원권의 신사임당과 5천원권의 율곡 이이를 그린 화가, 한국화의 현대화와 자생성을 평생 탐구한 작가, 독도를 ‘문화적 영토’로 일군 화가가 우리 곁을 떠났다.
기자는 2015년 11월 매거진N에 ‘이종상 화백의 예술혼에 푹 빠지다’라는 글을 썼다. 당시 화백의 작품과 삶을 접하며 느낀 마음을 제목에 그대로 담았다. ‘푹 빠지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예술은 기교에 머물지 않았다. 역사와 현실을 보는 시선,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예술가로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가 그림에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뒤 여러 자리에서 화백의 이야기를 들었다. 화백은 자신의 예술이 시작된 어린 시절을 들려주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림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얼마 뒤부터 손님들이 아버지의 그림보다 일곱 살 아들이 그린 그림에 더 눈길을 주었다고 한다. 화백은 “그때 아버지의 질투를 처음 보았다”며 웃었다. 그 뒤로 아버지가 친구들을 집에 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스승이었다. 고암 이응노를 찾아가 그림을 배울 만큼 화가를 꿈꾸었던 그는 집안의 반대로 원예학을 전공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잇기를 바랐다.
예산의 집에는 칠면조와 금계, 거위, 닭처럼 두 발로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이 많았다. 소나 돼지처럼 네 발 달린 짐승은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느려 그리기 쉬웠다. 아버지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새들을 보고 아들이 속사화, 곧 크로키를 익히게 했다.
화백은 순간을 눈과 머리에 새긴 뒤 손으로 옮기는 훈련을 어린 시절부터 한 셈이다. 그는 훗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한다”며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잔재영상을 오래 붙잡는 것이 속사화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교수가 된 뒤에도 학생들에게 같은 훈련을 시켰다. 학생들을 인솔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갈 때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그리게 했다. 멈춰 있는 정물만 그려서는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움직임을 한순간에 포착해야 사물의 본질과 생명에 다가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학생들에게는 엄격했지만, 자신이 쌓은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193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회화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대장간 풍경을 그린 <장(匠)>을 출품해 특선했다. 이후 3년 연속 특선하며 최연소 추천작가가 됐다. 동국대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교수와 서울대 박물관장을 지냈다.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그의 그림은 화실 안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대 회화과 2학년 때 4·19혁명에 참여해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듬해 국전에 출품한 대장간 그림에는 무뎌진 연장을 다시 벼리듯 시대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화가로 출세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림에서 입선만 하면 내 그림이 포스터처럼 전국 대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흩어진 고철도 한데 모으면 농기구가 되고 곡식을 생산해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의 예술과 삶을 관통했다. 그에게 대장간은 낡고 무뎌진 세상을 다시 벼리는 곳이었다.

그의 붓은 독도로 향했다. 1977년 처음 독도를 찾아간 뒤 수십 년 동안 바위와 파도, 물안개와 해돋이를 그렸다. 그는 “지도의 어머니는 풍경화”라고 했다. 우리 손으로 독도를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도에 대한 그의 작업은 영유권을 외치는 구호를 넘어 예술과 문화로 우리 땅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문화적 영토’의 확장이라고 불렀다.
2013년 7월 매거진N 창간호 인터뷰에서도 독도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이 인터뷰는 2019년 5만원권 발행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엔에 다시 실렸다. 당시 그는 독도를 그리는 한국 화가가 수백명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가 문화적 영토를 먼저 일구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독도에서 고구려로, 화폐의 정밀한 영정에서 거대한 벽화로 건너갔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다 사회주의 작가로 몰려 남영동에 끌려가 조사받는 고초도 겪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1999년 북한의 초청을 받아 덕흥리 등 고구려 고분벽화를 직접 살폈다.
“독도에서 고구려까지, 나는 손이 마렵다.”
그리고 기록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예술가의 갈증이었다. 그의 손은 한 시대의 얼굴과 우리 역사의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화백은 초상화를 그릴 때도 대상을 닮게 옮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인물의 삶과 정신까지 화폭에 담아야 비로소 영정이 된다고 했다. 후손이 조상의 영정을 부탁해도 조상을 대하는 태도와 의도가 바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산 윤선도의 영정을 그릴 때는 고산의 부모와 형의 골상 자료를 바탕으로 3D 작업을 거쳐 얼굴 형태를 추정했다. 향을 피우고 고산의 글을 읽으며 그의 인품과 정신을 이해하려 했다. 그는 “영정을 그릴 때면 신접하는 지경까지 간다. 그렇지 않으면 붓을 들지 않는다”고 했다. 돌아가신 인물과 대화하듯 몰입해야 비로소 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2015년 기자가 평창동 화실을 찾았을 때도 화백은 작품 한 점 한 점에 담긴 생각을 들려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넘어 왜 그것을 그려야 했는지 설명했다. 그의 말에는 예술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 사물을 오래 관찰하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대상의 내면과 인품까지 헤아린 뒤에야 붓을 들었다.
화백은 예산과도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한때 어떤 연유에선지 고향 땅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최승우 예산군수가 그의 예술적 성취를 기리고 고향으로 다시 초청하면서 예산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최 군수 재임 중에는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도 추진됐다. 이 화백 부부는 2012년 예산군청에서 열린 기념관 건립 중간보고회에도 참석했다.
최승우 군수의 인연으로 나도 화백에게 5만원권과 5천원권에 연필 서명을 받았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가 화백의 서명을 통해 다시 만난 지폐였다. 한비야씨와 함께 예산에서 화백을 만나 식사한 적도 있다. 화백은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설명했다. 대가라고 해서 말을 아끼거나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다. 제대로 들으려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평생 쌓은 경험과 생각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에게 화폐 영정은 단순한 도안이 아니었다. 이종상 화백은 “화폐는 30~50년간 쓰이는 국가의 공유재산이자 문화가치”라며 그 안에 국민의 자존심이 담겨 있다고 했다. 생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가진 사람이 누구보다 많다고 농담했다. 누구의 주머니를 열어도 자신이 그린 신사임당이나 율곡 이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통은 보존만 해야 할 과거의 양식이 아니었다. 새롭게 밀고 나가야 할 출발점이었다. 장지와 동유화 등 여러 재료와 기법을 실험했고, <원형상> 연작과 현대진경을 통해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근원을 탐구했다. 서구 미술을 좇지 않고 우리 역사와 재료에서 현대성을 찾아야 한다는 ‘한국 미술의 자생성’은 평생의 화두였다.
그는 “가장 미시적인 것은 가장 거시적인 것과 통한다”고 했다. 작은 화폐 영정과 거대한 벽화, 한 사람의 얼굴과 민족의 역사, 독도의 바위 하나와 나라의 영토를 하나의 붓끝으로 연결했다.

딸을 먼저 떠나보낸 뒤 가톨릭에 귀의한 화백은 충남 당진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들어갈 순교기록화 제작에 여러 해를 바쳤다. 역사성과 종교성, 예술성뿐 아니라 보존성까지 갖춰야 한다며 서두르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처럼 천년을 견디는 그림을 남기겠다며 재료와 기법을 연구했고, 직접 깎은 종려나무 목필로 밑그림을 그렸다.
주변에서 빨리 완성해 달라고 해도 그는 “그림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이냐”고 했다. 중요한 것은 행사 일정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역사와 순교자의 삶을 제대로 고증해 오래 남을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4년에 걸쳐 작품을 재능으로 봉헌했고, 순교미술관은 2017년 문을 열었다.

2014년 아시아기자협회의 ‘내 마음의 스승’ 행사에도 참석했다. 세월호 참사로 모두의 마음이 무거웠던 때였다. 이 화백은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가 서로 다른 화폐에 함께 등장한 경우도, 한 화가가 두 화폐의 영정을 모두 그린 경우도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참석자들에게 직접 서명한 지폐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제 사인이 들어 있는 화폐는 액면가의 100배에 거래된다는 말도 있으니 좋은 데 쓰시라.”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는 무거운 자리에서도 사람을 웃게 하고, 자신의 재능을 다른 이들과 나눌 줄 알았다.

2017년 정유년 새해에는 독도 위로 떠오르는 해와 가슴을 편 장닭을 그려 아시아엔 독자들에게 보내왔다. “신희계명 만사형통(新禧鷄鳴 萬事亨通)”이라는 글과 함께 아시아엔의 큰 꿈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나는 그를 늘 “존경하는 이 화백님”이라고 불렀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건안과 건승을 기원하는 안부를 여쭸다. 매거진N을 받으면 “잘 만들었다. 수고 많다”고 격려해 주었다. 아시아엔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며 깊은 관심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종상 화백은 아시아엔과 매거진N의 오랜 독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제 더는 “늘 한결같이 일신우일신 하시라”는 안부를 드릴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화백의 작품은 우리 지갑 속에, 독도의 바위와 파도 위에,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와 한국화의 역사 속에 남아 있다.
무엇보다 그는 화가라면 자신이 사는 시대의 현실과 민족의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남겼다.무뎌진 세상을 다시 벼리고, 기록되지 않은 우리 땅과 역사를 화폭에 남기는 일이 그의 예술이었다.

존경하는 이종상 화백님, 독도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처럼 화백님의 예술과 정신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시아엔 발행인 이상기 삼가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