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0월 18일, 평범한 한국인 사업가 지익주씨가 필리핀 경찰 본부 캠프 크라메에서 목숨을 잃었다. ‘마약 단속’을 가장한 납치·공갈·살인이었고, 시신은 장례식장에서 화장돼 흔적도 희미해졌다. 공권력이 범죄의 공범이 될 때 무엇이 무너지는지, 그날 이미 보였다. 9년이 흘렀다. 필리핀 사법은 더디지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급자부터 유죄가 나오더니, 2024년 7월 19일 항소법원이 지휘선상 핵심이던 라파엘 둠라오의 무죄를 뒤집어 유죄를 선고했고, 2025년 6월 30일 대법원은 그의 집행정지 신청을 각하했다.
그 사이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인 피해가 연쇄적으로 터졌다. 취업 미끼에 넘어간 청년들이 여권을 빼앗기고 갇혔고, 일부는 고문을 당했다. 정부 집계로 2025년 8월까지 330건의 관련 신고가 접수됐고, 안전 미확인자 약 80명 보도도 이어졌다. 정부는 10월 10일 주한 캄보디아 대사를 초치하고 현지 ‘코리안 데스크’ 설치 등 합동 대응을 발표했지만, 여론이 끓은 뒤에야 속도를 낸 사후 대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결과다. 실종자 전원(을 목표로) 위치 확인, 피해자 전원(을 목표로) 귀환, 가해자 송환·기소. 이 세 가지를 시간표와 수치로 공개·업데이트해야 한다. 의례적 항의에 머물지 말고, 피해자 신속 접견·공인 통역·변호 동행·증거 보전·응급 의료 동반을 표준화한 즉시 집행 프로토콜과 24시간 핫라인을 깔아야 한다. ‘코리안 데스크’ 간판만으로는 현장에서 바뀌는 게 없다.
국내도 손봐야 한다. 가짜 구인광고와 리쿠르팅 브로커를 끊어내는 플랫폼-정부 상설 TF를 만들고, 구조는 치안이자 인권이라는 원칙 아래 심리치유·재활·법률 지원을 예산으로 패키지화해야 한다. 교민사회엔 분기 1회 설명회, 중·고령층 예방교육, 모의훈련, 민관 ‘안전 파수꾼’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해외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가도 안전하게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보여줘야 한다.
필리핀의 교훈은 분명하다. 공권력 가담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끈질긴 외교·법률 지원과 사법 절차가 이어지면 핵심 책임자에게 유죄를 끌어낼 수 있다. 캄보디아도 예외가 아니다. 감정의 외교가 아니라 사실의 외교로, 공동합동수사팀(JIT) 구성, 디지털 포렌식 상시 협력, 인신매매·강제노역 연루 사업자에 대한 국제 제재 채널까지 검토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먼저 준비된 집요함을 보일 때 상대 정부도 움직인다.

정부 비판이 과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파견했다”, “촉구했다”, “협의 중이다” 같은 표현은 보고용 문장일 뿐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필리핀의 지익주씨 사건이 그랬고, 지금 캄보디아의 비명도 그렇다. 국가는 해외의 국민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놓고, 사건이 커진 뒤에야 뒤쫓듯 대응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외교는 신뢰의 산업이고, 신뢰는 반복 가능한 성과에서 나온다.
9년 전 지익주씨는 국가의 경계 밖에서 죽었다. 9년 뒤 또 다른 젊은이들이 캄보디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사건 사이에 놓인 건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다. 우리는 이미 한 번 배웠다. 끝까지 가는 수사공조, 끊기지 않는 법률 지원, 계획대로 움직이는 구조망이 범죄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을. 이제는 배운 대로만 하면 된다. 실종자 전원 찾고, 피해자 전원 돌려받고, 가해자 전원 법정에 세우자. 그때 비로소 국가는 약속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