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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칸 통신①] 75회 칸영화제 개막…박찬욱 경쟁 심사위원장으로 특유의 존재감 발산

박찬운 심사위원장(가운데)와 데미 무어(왼쪽), 클로이(오른쪽), 뒤는 통역

개막작 <디 일렉트릭 키스>, 인간성을 향한 칸의 휴머니즘적 구애

[아시아엔=칸/전찬일 영화평론가] “영화제의 존재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제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영화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볼 기회를 잡지 못했을 그런 영화들이 알려지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생각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심사해서 ‘누가 최고다, 누가 2등이다, 3등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웃기는 일 같고 무의미한 일 같지만, 바로 여기에 또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영화에 더 집중해주세요, 라고 여러분에게 호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5월 12일 오후 2시 30분(현지 시간)부터 열린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 박찬욱 감독이 들려준 답변이다. 영화제의 존재 이유를 이보다 더 적확하게 드러낼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는 또 “정치와 예술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며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의 적이라고 인식돼서는 안 된다. 예술과 정치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단, ‘예술적 탁월함’이라는 전제를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파간다(선전선동)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여러모로 ‘박찬욱다운’ 진술이었다.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후 7시 10분, 제79회 칸영화제가 12일간의 대장정에 공식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일찍이 2017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 있는 박찬욱 감독이 영예의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것은 한국 영화인으로서는 최초다. 아시아인으로는 1962년 일본의 후루카키 테츠로 전 NHK 회장, 2006년 홍콩 왕가위 감독에 이어 세 번째다. 기자회견장뿐 아니라 개막식 현장에서도 ‘깐느 박’ 특유의 존재감은 단연 빛을 발했다. 9인 심사위원단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들은 2024년 칸 각본상을 안은 전작 <서브스턴스>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데미 무어, <노매드랜드>와 <이터널스>(2021), <햄넷>(2025)의 명장 클로이 자오, 그리고 박찬욱 정도여서인지 회견장에서의 질문도 그들에게 집중됐다. 켄 로치 영화의 시나리오를 도맡아 써온 거장 폴 래버티가 수시로 현실 정치에 대한 발언을 피력하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예술적 지성과 대중적 카리스마를 겸비한 인물’로 칸으로부터 선택받은 말리계 프랑스 배우 에이 아이다라의 사회로 펼쳐진 개막식에서도 박찬욱의 뚝심은 빛을 발했다. 그의 한국어 인사말과 소감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긴 했어도 존재감만큼은 압도적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부터 <어쩔 수가 없다>(2025)에 이르는 연출작들의 편집 영상을 지켜볼 때는, 그 어떤 웰메이드 영화도 압도하는 강렬한 감흥을 안겨줬다.

박찬욱이 개막식 전반부의 주인공이었다면, 중반부의 주인공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거장으로 올해 칸의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피터 잭슨과 <백 투 더 퓨처 2>(1989)의 열여덟 소년에서 40대 중반의 중견 배우로 성장한 ‘프로도’ 일라이저 우드였다. 두 스타는 다소 길고 장황한 입담으로 좌중을 이끌었다. 그에 반해 올해 칸 포스터를 장식한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감독, 1991)의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전 서랜든)에게 오마주(경의)를 바치기 위해 등장한 듯한 세계 영화계의 두 여걸 공리와 제인 폰다는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인사말과 개막 선언으로 개막식의 대미를 감동적으로 수놓았다. 공리는 “제인은 서쪽에서, 나는 동쪽에서 왔다. 오늘 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서 있다. 이것이 칸영화제의 마법”이라며 올해 칸의 확장된 비전을 설파하고 공유했다.

피에르 살바도리 감독 영화 <디 일렉트릭 키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개막작은 프랑스 피에르 살바도리 감독의 <디 일렉트릭 키스>였다. 1928년 파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유머 가득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코믹 휴먼 드라마다. 아내가 사망한 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재능 있는 화가와 그의 아내, 그 화가를 이용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하는 화상(畫商)이자 갤러리 주인, 그리고 생계를 위해 남성 고객들과 ‘전기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카니발 노동자이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빚어내는 여인까지, 네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기자기한 휴머니즘적 재미와 의미를 던져준다. 칸의 명성이나 권위를 감안하면 지나치게 무난한 선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AI 시대가 전개되며 날로 위협받고 있는 인간성을 향한 칸의 구애가 아닌가 싶어 지지하고픈 것도 사실이다. 출연진의 흡인력 넘치는 연기와 반전 매력을 지닌 서사를 즐기는 맛도 만만치 않다.

황금종려상을 향한 본격적인 레이스는 13일 오후부터 시작됐다. 무려 세 편이나 경쟁작을 내며 파란을 예고하고 있는 일본 영화들 가운데 하나인 <나기 일지>(후카다 코지)와 프랑스 영화 <여자의 일생>(샤를린 부르주아-타케)이 첫 타자로 나섰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호프>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 이후 4년 만에 경쟁 부문에 입성하면서 수상 여부에도 벌써부터 크고 작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호프>는 비무장지대에 자리한 호포항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린다. 황정민이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 역을, 조인성이 마을 청년 성기 역을 맡았으며, 독일 출신 할리우드 배우 미하엘 파스벤더와 스웨덴 출신 월드 스타 알리시아 비칸데르, <본즈 앤 올>로 2022년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거머쥔 테일러 러셀이 외계인 캐릭터를 연기한다. 총 22편의 경쟁작 가운데 미국 영화 두 편(<내가 사랑하는 남자>·아리아 잭스, <페이퍼 타이거>·제임스 그레이)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가 아닌 이른바 ‘작가 영화’인 데다, 장편 데뷔작 <추격자>(2008·비경쟁 미드나이트 스크리닝)부터 <황해>(2010·주목할 만한 시선), <곡성>(비경쟁)까지 전작 세 편이 모두 칸에 공식 초청된 터라 <호프>를 향한 관심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호프>는 17일 오후 9시 30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공식 첫선을 보인다.

한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16일 오전 0시 30분에, 비공식 병행 섹션 가운데 하나인 감독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의 <도라>는 17일 오전 8시 45분과 오후 6시에 각각 상영된다. (계속)

필자 전찬일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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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

'아시아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봉준호 장르가 된 감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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