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아내와 멜리에스 빈티지 시네마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방인>을 보았다.
흑백 화면에 담긴 알제리의 한적한 해변이 아름다웠다. 영화관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자막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긴장해서 보았더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남는 것은 달랐다.
나는 프랑스 문학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오래전에 카뮈의 <페스트>와 <이방인>을 읽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희미해졌다. 오늘 본 영화도 문학적 해석보다는 몇 장면과 거기서 떠오른 생각이 오래 남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바다에서 수영한다. 어머니를 잃고도 평소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낯설게 보인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느라 지친 사람이 바다에서 몸을 움직이며 잠시 쉬는 것이 왜 잘못일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까지 남들이 정한 기준에 맞춰야 하는 것일까.
이 장면을 보며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떠올랐다. 1994년 어머니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을 무렵, 그가 뉴욕 거리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그 장면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아들이 어떻게 저렇게 평소처럼 지낼 수 있을까. 한국에서 자란 내게는 상중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처럼 보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에서는 부모의 죽음 뒤에 오랜 애도를 요구했다. 부모의 묘 곁에서 지내는 시묘살이도 있었다. 효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뜻을 헤아리고 봉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돌아가신 뒤 슬픔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와도 연결되었다.
그러나 부모를 잘 모시는 일과 장례식에서 슬픔을 표현하는 일은 같지 않다. 살아 계실 때 부모의 뜻을 헤아리고 정성껏 봉양하는 것이 효의 실천이라면, 장례식에서 흘리는 눈물의 양만으로 그 사람의 효를 가늠할 수는 없다. 크게 우는 사람이 반드시 부모를 더 잘 모셨던 것도 아니고,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불효했던 것도 아니다. 때로는 생전에 잘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장례 뒤에야 눈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던 청개구리 아들이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유언을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는 아들이 이번에도 거꾸로 행동할 줄 알고 물가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을 따랐고, 비가 올 때마다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울었다. 불효한 자식의 뒤늦은 후회를 담은 이 이야기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와도 겹쳐진다. 죽은 뒤의 눈물에는 살아 계실 때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담겨 있기도 하다.
장자의 「지락(至樂)」 편에도 아내의 죽음을 맞은 장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혜시가 문상을 갔더니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슬퍼했지만, 삶과 죽음 또한 자연의 변화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뫼르소의 태도를 장자의 철학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가 나란히 떠올랐다.
영화에서 뫼르소는 이웃과 어울리고 부탁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감정이나 삶의 목표를 굳이 연기하려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결국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내가 본 장면은 단순히 햇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랍인이 칼을 꺼내는 순간과 눈부신 햇살이 겹치면서, 뫼르소가 상대의 움직임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남는다.
재판 장면에서 변호인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재판하는 것은 아랍인을 살해한 사건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은 아들의 인격인가.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보인 태도가 거듭 문제 되는 동안, 살해당한 아랍인에 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뒤로 밀려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살해당한 아랍인의 여동생이 무덤을 찾는다. 묘비에는 무사(Mus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보며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의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의 재구성>이 떠올랐다. 다우드는 카뮈의 소설에서 이름 없이 등장했던 피해자에게 무사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의 동생 하룬의 목소리로 사건을 다시 이야기했다.
뫼르소에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왜 울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사에게도 그를 잃고 슬퍼하는 가족이 있었다. 한 사람의 감정과 인격은 재판의 중심에 놓였지만,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은 오랫동안 이름 없이 이야기 속에 남아 있었다. 영화 속 묘비에 적힌 이름은 그 차이를 조용히 드러내는 듯했다.
카뮈가 80여 년 전에 만들어 낸 뫼르소는 사회의 관습과 기대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인물이다. 오늘날에도 남들이 정한 성공의 기준이나 감정 표현의 방식에 맞추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모두 뫼르소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익숙한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슬픔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영화관을 나서며 처음에는 뫼르소가 왜 어머니의 장례 뒤에 수영을 했는지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른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얼마나 쉽게 판단하는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 사람의 이름은 얼마나 오래 잊고 지내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