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원에 갔다. 728m에 이르는 긴 회랑을 인파에 밀려 반쯤 걸었다. 273칸의 회랑에는 1만4천여 폭의 그림이 이어져 있었다. <서유기>의 이야기도 있고, 역사와 전설의 장면들도 있었다. 그림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었다. 문득 피렌체에서 바사리 회랑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그곳에서도 나는 그림을 따라 걸었다.
이화원의 이 길을 백여 년 전에는 태후가 걸었을 것이다. 내관이 곁에서 그림 속 이야기를 들려주면, 태후는 천천히 걸으며 그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오늘 그 길에서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듯한 여성이 검은 전통복장을 입고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에는 금빛 호갑투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벽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옷과 장신구를 빌리고 화장까지 하는 데 5만원 정도면 된다고 했다. 5만원이면 백 년의 시간을 잠시 빌릴 수 있는 셈이다. 비행기를 타고 먼 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화원은 황실의 정원이면서 사진 한 장을 남기는 무대가 된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꾸미고 호갑투까지 끼면, 잠시나마 백 년 전의 태후나 귀부인이 되어볼 수 있다.
어쩌면 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관광객이 아니라 배우가 된다. 자신의 사진 속에서는 누구나 주연이다.
아내는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몇 달 전 딸과 함께 상하이에 갔을 때, 딸도 그런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여 시간이 이미 끝난 뒤였다. 다음 날은 오전 10시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는데 가게는 9시에 문을 열었다. 결국 딸의 작은 바람을 이루어주지 못했다.
나는 이화원의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딸이 시간을 낼 수 있을 때 경복궁에 함께 가야겠다. 한복을 입고 머리도 꾸민 딸의 사진을 찍어주어야겠다. 상하이에서 이루지 못한 바람을 서울의 궁궐에서 이루는 것이다. 딸도 그곳에서 잠시 다른 시간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여행하면서 장소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한 장은 그 짧은 시간의 증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