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P 전문가 칼럼] 인도네시아, ‘종교 국가’가 된 이유

종교적 자유의 경계 : 인도네시아 1965년 대통령령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종교가 없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고요?” 필자에게 한국의 종교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인도네시아인 아리는 한국 인구의?과반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교(無敎)라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은 듯 몇 번이고 되물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은 워낙 극소수고 그마저도 파푸아 등 오지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란 마치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란 인상이 있기에 한국처럼 발전한 나라에 종교가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아리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종교가 없어도 정말 괜찮은가요?” 아리의 다음 질문은 대답하기 힘들었다. 종교가 없어도 과연 괜찮은지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적 삶에서의 종교의 역할은 사회학자가 대답할 성질의 질문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역할이 상당하다는 것은 굳이 여러 사례를 들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종교가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삶과 연계될 때 발생하는데,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이 질문을 도대체 어디서 받느냐에 따라 그 대답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우디 아라비아나 브루나이, 폴란드나 동티모르, 태국이나 미얀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터키나 인도네시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매우 상이하다. 아리에게 되물었다. “종교가 없으면 왜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세요?”라는?질문에 아리는 머뭇거리면서도 성실히 말했다. 종교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왜 안 되는지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인도네시아 국민을 종교의 길로 인도한 것은 놀랍게도 신학적 계시가 아니라 정부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아리가 태어나기 불과 몇 해 전인 1965년, 당시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슬람, 천주교, 개신교, 불교, 힌두교 그리고 유교 등 6개의 종교를 인도네시아 국가 공인 종교로 지정하는 대통령령(Presidential Decree of 1965 regarding state-recognized religions)을 공포하였다.

정부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국가 돼

제정 당시 이 법안의 구속력은 미약했지만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일명 9.30 사태가 발생하면서 이 법안은 인도네시아에서 종교와 정치의 상호 작용의?출발점이 되었다.

1965년 9월 30일 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자카르타에서 7명의 군부장성 집을 습격해 6명을 살해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곧바로 자카르타 PKI 기관지는 이 쿠데타를 공식지지하는 사설을 냈고, 중부 자바 수라카르타 시장 및 족자카르타 공산당 당원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집회를 여는 등 호응에 나섰지만 당시 수하르토 장군이 중심이 된 군부는 이 쿠데타를 빠르게 진압하였다.

문제는 이후 벌어진 공산주의자 색출 및 처형에 군부는 물론 여러 종교단체가 참여하면서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피해자 수치는 오늘날까지도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학계는 대략 5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재판 없이 감옥형에 처해졌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다가 많은 수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군부의 강압적인 수사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프람모디아(Pramoedya Ananta Toer) 역시 공산주의자로 분류돼 악명 높은 부루(Buru)섬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그 역시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한 사례는 유명하다.

이 대량 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네시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는 구소련과 중국을 빼고 전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군부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1950년대부터 자신의 정치기반을 위해 서서히 공산당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55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네 번째로 큰 정당으로 올라섰고 그 2년 뒤 치러진 1957년 선거 결과 역시 매우 놀라웠다.

특히 중부 및 동부 자바지역에서 공산당은 최고의 득표를 올리며 최대 정당으로 부상하여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정권은 인도네시아의 공산화, 혹은 적어도 자바의 공산화를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주 인도네시아 미국대사였던 하워드 존스(Howard Palfrey Jones)는 그의 저서 <인도네시아(Indonesia: The possible dream)>(1971)에서 당시 미국정부는 인도네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고 밝혔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기 보다 토지개혁 프로그램에 호응한 소작농들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9.30 사태 이후 군부는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었고 이에 수하르토 정부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공산주의 세력 팽창 막기 위한 수단?

즉 공산주의자는 종교를 부정하기 때문에 종교가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분류해 처벌하기 시작했고 당시 종교가 아예 없거나 국가가 공인한 종교 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1965년 대통령령이 정한 종교 중 하나로 대거 개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일시에 개종한 국가가 되었다.

종교와 관련된 법안이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이유로 실행된다는 것을 보여준 1965년은 비단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종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이다. 1965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보상으로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한 1924년 법안(Asian Exclusion Act)을 폐지했다. 1924년 법안에 따르면 아시아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고, 미국인과 결혼도 할 수 없으며 토지에 대한 권리 역시 주장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의 폐지 후 아시아인들의 미국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swami, bhagwan, yogi, guru, pir, sensei 혹은 master 등의 다양한 명칭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1970년대와 80년대를?’개종의 시대’로 부를 만큼 수많은 신흥종교들(New Religious Movements: NRMs)이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Melton G.J., 1999, Anti-cultists in the United States: An historical perspective).

20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미국 선교사들의 세계를 향한 포교가 많은 아시아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듯이, 1965년 이후 아시아 종교들이 미국 사회에서 기본권으로 이미 확고한 위치에 있던 종교적 자유와 그 해석에 관한 새롭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교훈적이다.

수하르토 정부가 1965년 대통령령을 강력히 집행한 이후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이제 인도네시아의 모든 국민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표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아마도 인도네시아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변화는 종교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인식 자체의 부재일 것이다.

예전 종교부 장관이었던 이드함 칼리드(Idham Chalid)는 인도네시아에서 종교의 자유란 국가가 공인한 종교들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이지 종교 자체를 가지지 않을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확히 밝혔다. 그는 종교를 곧잘 의복에 비유하였는데 종교적 자유는 마치 어떤 옷을 입을까를 정할 자유이지 누디스트(nudist)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서명교/한국외대 강사>

*이 글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운영하는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EMERiCs)에서 제공했습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