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왜 한류에 열광하나

아시아 문화적 뿌리 교감…‘나눔의 한류’로 성숙 필요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거리를 달리는 택시 대부분이 현대 소나타라는 사실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택시를 타고 한국 건설회사가 지은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마리나 샌즈(Marina Sands) 건물을 지날 때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음식점이나 쇼핑몰에서 고객이 한국인임을 알아채면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들에게 한국어는 더 이상 낯선 외국어가 아니다.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에 설치된 한국작가 이수홍의 조각작품. '자연의 대화(Conversation from Nature)'란 제목의 이 작품은 한국과 싱가포르의 국화인 '무궁화'와 '난'을 상징하는 형상을 담아 양국 간 교류와 우정을 표현했다.

“제 아내가 한국드라마에 빠져서 식사를 제때 차려주질 않아요”라는 택시기사, 한국에서 성형외과 잘 하는 곳을 소개해 달라는 아가씨, “매진된 K-Pop 공연 표 좀 어떻게 구할 수 없느냐”는 청년 청년, ‘1박2일’ 프로그램에서 나온 곳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묻는 아저씨, 그들 모두 내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고 부담 없이 다가온다. 유명 관광지 센토사의 특급호텔 뮈벤픽은 최근 한국인 쉐프를 총주방장으로 앉히고 ‘강남 메뉴’라는 한식 퓨전요리를 선보였다. 싱가포르의 지하철 공사현장마다 한국 건설사의 로고가 붙어 있고, 화점의 유명 브랜드 화장품코너에 고가의 한국 한방화장품이 진출했다. 이 모두 싱가포르에 살면서 체감하는 ‘한류’의 여파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작 발레 <심청>. 아시아권 정서에 맞는 주제 '효'를 표현한 발레극으로 싱가포르 관객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

과연 무엇이 싱가포르 사람들을 한류에 열광하게 만드는 걸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아시아인의 피가 흐르는 그들이 서양 문화콘텐츠를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류는 그 틈새를 파고 들어 공허한 내면을 채워주고 있다. 특히 사극과 가족드라마, 쇼, 오락, 교양 등 다양한 콘텐츠는 문화적 뿌리가 같은 아시아인끼리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한국어를 배워 한국 드라마와 노래 가사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한국어 강좌는 여는 곳마다 호황이다. 드라마와 K-Pop은 싱가포르인의 갈급한 문화욕구를 채워줄 뿐 아니라 생활양식과 삶의 진로까지 바꿔놓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 모임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수입하는 싱가포르 사업가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그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홍콩 영화를 주로 수입했는데 콘텐츠가 한국처럼 다양하지 않더군요. 한국 드라마엔 공통된 메시지가 있어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같은 사극이든, ‘아이리스’ ‘추적자’ 같은 스릴러든 장르를 막론하고 가족애와 충성심이 담겨있어요. 그래서 저는 한국드라마를 항상 아이들과 함께 봅니다. 점점 서구화되면서 사라져가는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지요.”

영문학 전공자인 한 싱가포르 친구는 한국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아시아인일 뿐이에요. 깊은 정서나 정신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껴요. 그런데 한국영화 대사 중 상황에 적절한 문학적인 표현들은 가슴에 깊게 와 닿아요. 감성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을 느껴요. 한국 영화 대사는 깊이가 있어요”

한국의 뷰티풀 마인드 자선공연. 장애인 음악가와 함께 세계를 돌며 클래식과 국악 등 공연을 해 수익금을 현지 장애인 복지기관에 전달하고 있다. 예술을 통해 국격을 높이는 '공공외교'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창조경제 밑거름 될 콘텐츠 전략

어떻게 보면 한국처럼 다양한 소재와 콘텐츠를 갖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사료, 서한, 야화, 설화 등 각종 장르의 기록은 시대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식민지, 전쟁, 분단, 민주화운동 등 비록 아픔으로 점철된 역사지만 그 독특한 경험은 다양한 스토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재로 손색이 없다.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각종 전문분야(의료계, 재벌가, 정계, 산업계 등)를 다루는 드라마 콘텐츠 개발의 보고다. 탄탄한 구성의 각본, 출중한 연기력, 선진화된 그래픽 효과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에 충분하다.

몇 년 전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루아(Christian Lacroix)의 오페라를 위한 무대의상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장에 오페라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프랑스 와인 시음장과 향수·화장품 부스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부대행사의 입체적인 기획은 고급화된 상품 이미지가 수준 높은 예술과 접목돼 홍보와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싱가포르 한국국제학교의 한국어코스는 3개월 단위로 진행되는데, 1기에 200여명이 등록한다. 대부분 직장인과 학생들이 저녁시간에 한국어를 배우러 온다. 한국문화 행사로 열린 한국요리 특강 '김치만들기'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짧은 역사와 작은 국토 그리고 적은 인구를 가진 싱가포르는 어떤 문화산업 전략을 갖고 있을까. 싱가포르 정부는 말 그대로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문화예술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개방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전략을 수립하고 관계기관들과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다국적 기업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강조,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업에 대한 면세혜택(지원금의 2.5배 감면) 같은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또한 고급인력인 전문직 외국인과 배우자들의 자원봉사로 문화예술 분야의 인적자원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21세기 아시아의 미래를 주도할 한국은 ‘한류‘에 대해 어떤 청사진을 갖고 있을까. 한류를 새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밑거름으로 삼으려면 문화예술 콘텐츠의 글로벌 마케팅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미래 전략이 필요하다. 이벤트 성격의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행사보다 각 나라 상황에 따른 사전 연구조사에 근거한 맞춤식 콘텐츠 개발이 절실하다. 배정된 예산 소비를 위해 급조된 행사나 현지 대중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콘서트, 현지홍보 부족으로 객석이 텅 빈 공연, 콘텐츠 고갈로 반복되는 공연 등은 피해야 할 것이다.

‘공공외교’로서 문화예술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인과 현지인이 함께 교감할 수 있는 자선 예술행사 등 확실한 목적을 지닌 전략적인 콘텐츠·행사 기획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미풍양속인 ‘이웃돕기’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선한류’가 미래를 이끌어갈 새 세대의 한류문화로 도약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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