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평화운동가 ‘아키라’, “지뢰 제거 150년 걸릴 것”
*이 글은 캄보디아 현지에서 ‘아키라’를 돕고 있는 빌 모스 CSHD 국제 프로젝트 매니저가 아시아엔(The AsiaN)에 보낸 글입니다. 아키라는 2012년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자입니다.
아키라는 누구인가?
어린시절
아키라는 그의 본명인 ‘아키라(Aki Ra or Akira)’로 불리고 싶어 한다. 그는 살면서 많은 이름이 있었다. ‘아키라’라는 이름은 그가 지뢰제거활동을 시작한 20대에 한 일본친구가 지어준 것이다.?생물학적 가족이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는 1970년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에서?태어났다.?5살 때?가족과 떨어져 크메르 루주 마을에서 자랐다. 마 연(Ma Yeourn)이라는 여군이 그를 집으로 데려와 키웠다.?아키라에게는 어머니나 다름없었다.?10살에 크메르 루주 조직은 그에게 총을 쥐여줬다. 그는 군인이 됐다. 그는 두려웠을까? “아니요, 나는 10살이었고 그것은 모험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직접 나르고 무작위로 설치했던 지뢰에 대해서는 “나를 많이 무섭게 만든 일”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 지뢰들이?내 친구들과 동물들을 날려버리는 것을 보고는 그 일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13살에 베트남 군대에?잡히기 전까지 크메르 루주 편에서 싸웠다. 그는 베트남이 1988~1989년 캄보디아를 떠날 때까지 싸웠다.?UN이 1990년대 초반 그에게 찾아왔고, 그들에게 지뢰제거 방법을 보여주기 전까지 그는?캄보디아 군대 가입을 강요당했다. 그때까지?그는 평화라는 개념도 몰랐고, 전쟁은 모든 이들에게?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군인이 베트남 편에서 싸우고 있었고, 아키라는 크메르 루주 군에 대항해 전투 중이었다. 적을 자세히 보니, 그는 그 군인이 렌 삼촌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사방으로 총알을 퍼부었다.?아키라는 삼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렌 삼촌은 아키라 근처에 있는?베트남 군인들을 죽였다. 베트남 장군이 왜 삼촌을 죽이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둘러댔다. 나중에 그의 삼촌과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죽을 뻔한 그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었다.’
아키라는 UN에서 일하기 전까지?현대적인 건축물을 본 적이 없다.?페인트칠 된 건물을 보고는 한쪽 면을 만져보더니 ‘코끼리의 피부’라고 여겼다. 크메르 루주가 처음 그를 학교에 보냈을 때 그는 두려웠다. 그들에게 학교는 격전지를 의미하는 은어였다. 아무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평화의 의미를 교육받았고 처음으로 총을?곁에 두지 않고 잘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지뢰가…”세계가 캄보디아에게 전쟁선포한 것 같았다”
UN과 프랑스 NGO를 위해 지뢰를 제거하면서 아키라는?지뢰제거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지뢰를 설치하고 조립했던 지난 세월은 지뢰를 안전하게 분해하고 비활성화시키는?방법도 알게 했다. 이것은 그의 ‘장기’가 될 수 있었다. 아키라는 군인으로 싸웠던 마을로 다시 돌아와 직접 지뢰를 놓았던 장소를 찾아냈다. 또 다른 군인들이 심어놓은 지뢰들도 찾아냈다. 그는 과거를 속죄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도와 나라를 안전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가 찾은 지뢰 일부는 크메르 루주가 놓았던 것이기도 했고,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군대, 또는 다른 군대가 놓은 것이기도 했다. 전쟁은 1960년대 시작됐는데 폴포트가 사망한 1998년까지 계속됐다. 그가 찾은 지뢰들은 러시아, 중국, 미국, 베트남,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싱가포르 등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그의 나라가 누구에게도 전쟁을 선포한 적이 없음에도?전 세계가 캄보디아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보였다.
아키라는?지뢰제거에 필요한 도구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도구를 만들었다. 지뢰를 날려버릴 폭발물이나 비활성화시키는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분해해야 했다. 지뢰를 찾기 위해 양쪽을 테이프로 감싼 막대기로 땅을 훑고 다녔다. 그리고 모종삽으로 지뢰들을 꺼냈다. 그는 지금까지?5만여 개의 지뢰와 불발병기들을?제거했다. 그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고 그가 교육했던 사람들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지뢰잔해 모아 ‘지뢰박물관’ 건립,?기금으로?지뢰피해자 도와
그는 지뢰를 제거한 뒤 수많은?빈 케이스와 껍데기를 집으로 가져왔다. 관광객들은 이 새로운 ‘지뢰 박물관’을 보러 왔을 때 1달러의 요금을 냈다. 아키라는 그 돈을 모아 더 많은 지뢰를 제거하는 데 사용했다.?나라의 동서쪽 작은 마을에서 지뢰를 제거하면서 그는?상처받고, 부모님을 잃고 버려진 아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지뢰 피해자들을 발견했다. 아키라는 그들을 시엠(Siem)언덕 부근?자기 집으로 데려왔다.?그는 아내 하우트(Hourt)와 함께 그들을 돌보았다.?그들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
2003년 한 캐나다 자선단체가 이를 발견하고는 아키라와 함께 살기 위해 온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집과 새로운 박물관을 지어줬다. 박물관은 2007년 지금 장소로 이전했다. 지원금은 캐나다의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지원기금’에서 나온다. 캄보디아 지뢰 피해자는 2011년 211명으로 1년 만에 수천 명이 줄었다. 그 아이들의 집은 ‘지원센터(Relief Center)’로 불린다. 아이들은 지뢰 피해 외에도 소아마비에 걸리거나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경우도 있고 가난한 가족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다. 이 센터는?재활센터가 아니다. 그 근처에는?훌륭한 재활센터가 많다.?그곳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고 학교도 다니며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그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선단체에서 장학금도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재 지원센터에는 38명의 아이가 있다.?캄보디아의 다른 고아원과는 달리 이 센터는 대중에 개방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시품이 아니다.?관광객들에게 공연할 필요가 없다. 센터는 그들의 집이고 온전히 그들 스스로가 될 수 있는 장소다.
지뢰박물관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관광객들이 기부한 돈과 입장권 판매로 수익을 얻는다. 아키라는 지원센터 아이들 수를 몇 달 안에 50명으로 늘릴 예정이다.?아키라가 지뢰박물관을 지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 세계인들에게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배경이 어떻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전 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여파와 지뢰의 무서움을?알리고 싶었다. 캄보디아에만 500만 개의 지뢰가 있으며, 전 세계에는 1억 개가 넘는 지뢰가 있다. 2011년 4000건의 지뢰 피해가 발생했으며,?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보고도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수많은 아이를 보살피기 위한 것이다.
아키라는 앞으로 박물관 운영을 통해?지뢰제거에 필요한 자금을 댈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보살필 가족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다른 마을을 짓고 싶어한다. 기금은 티켓 판매수익과 기부금에서 나올 것이다.
아키라는 2005년까지 혼자서 지뢰를 손으로 제거해야 했다. 그때까지 정부는 지뢰제거작업처럼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뢰제거작업이 국제안전표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뢰제거작업에 드는 돈은 박물관이나 지뢰안정기금,?2003년 캄보디아 안전을 위해 세워진 미국 자선단체나 호주에서 온 베트남 지뢰제거전문팀이 후원한다. 아키라는 2006년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뢰제거작업을 중단해야?했다.
캄보디아 자가지원 지뢰제거작업(CSHD) 설립…아직 남은 지뢰는 500만 개
2007년 그는?지뢰제거작업을 위해 면허를 갖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작업을 ‘캄보디아 자가지원 지뢰제거작업(Cambodian Self Help Demining, CSHD)’으로 불렀다.?이는 캄보디아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작업이 될 것이다. 노력 끝에 2008년 그는 허가를 받았고, 지뢰제거를 위한 CSHD가 설립되었다.
CSHD는 캄보디아 전역의 작은 마을에서 지뢰를 제거했다. 그 단체는 5헥타르 미만 크기의 땅을 조사했다. 이 마을은 지뢰제거 대상 후순위에 놓여 있던 곳이다. 아직 500만 개의 지뢰가 남아 있다. 이 지뢰를 다 제거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려면 앞으로?150년이 걸릴 것이다.
CSHD를 위해 지뢰제거 하는 사람들은 소년병이었다. 그들은 과부, 미혼모, 미혼부 혹은 작은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거나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아키라와 그들은 서로를 찾았다. 그들을 교육하고, 봉급과 함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35년 동안 지속된 전쟁의 유산을 제거하기 위해 정글 속에서 한 달 중 25일을 일했다. 아무도 부상당하지 않았다. CSHD는 캄보디아의 지뢰제거 NGO 4곳 중 하나다.
CSHD는 30명의 지뢰제거팀을 꾸려가기 위해 한 달에 1만 7000달러를 필요로 한다. CSHD는 현재 미 국방부의 도움과 ‘지뢰 안정기금’, 호주에서 온 베트남 지뢰제거팀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박물관에서도 추가적인 자금이 들어온다.
아키라의 가족
2009년에 아키라의 아내 하우트(Hourt)가 숨졌다. 하우트는 임신 4개월 만에 아이를 잃었고 그 합병증으로 2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아키라의 양모인 마 연(Ma Yeourn)은 당뇨로 의한 합병증으로 죽었다. 그녀 나이 62세였다.
2012년 7월 렌 삼촌도 당뇨 합병증으로 숨졌다.?54세 나이였다. 몇 년 전 아키라의 친형 임(Im)이 그를 찾아 왔다. 그는 프놈펜에서?일하고 있다. 형은 종종 박물관을 방문해 아키라에게 프놈펜의 크메르 루주?마을에서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친모는 뱀에 물려 돌아가셨고 그의 아버지는 굶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록도 남기지 못한?채 죽어갔다. 아키라는 3명의 자녀가 있다.?두 아들은 각각 6살, 10살이고 엄마를 많이 닮은 딸은 4살이다.
나는 아키라에게 그의 목표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내 사람들을 위해 내 나라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그가 지뢰제거작업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나라가 안전해질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번역=김미래 인턴
정리=박소혜 기자 news@theasian.asia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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