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진리가 아닌 것들을 진리라고 여기는 ‘착각’

사도행전 16장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3)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울이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바울은 할례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까요? 유대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의 눈높이에 자신과 디모데의 눈높이를 맞춘 것입니다.

진리는 배타성을 띱니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절대적 실재이기 때문에 갖는 엄청난 포용력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라고 오해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기독교인들조차 진리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진리가 아닌 것들을 진리라고 여기는 착각입니다. 기독교 안에 흘러들어와 있는 전통, 관습, 문화, 윤리 등을 진리라고 오해하고는 자기 전통과 다르면, 자기에게 익숙한 관습과 다르면 틀렸다고 규정하고 정죄하기 일쑤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의 할례에 관하여 유연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바울 안에 확실했기 때문에, 그 외의 것들에 너그러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리인 이유는 그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포용이기 때문입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은혜로 구원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그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이 과연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있을까요?

본당의 십자가 위치가 왼쪽이면 어떻고 오른쪽이면 어떻습니까? 설교자가 양복을 입으면 어떻고 캐주얼을 입으면 어떻습니까?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면 어떻고 오프라인으로 드리면 어떻습니까?

아무렇게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좋은 것에 목숨을 걸다가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 걸어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만 목숨을 거셨습니다. 십자가에 목숨을 걸어 놓은 사람이 누리는 것이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본당의 십자가 위치가 왼쪽이면 어떻고 오른쪽이면 어떻습니까? 설교자가 양복을 입으면 어떻고 캐주얼을 입으면 어떻습니까?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면 어떻고 오프라인으로 드리면 어떻습니까? 아무렇게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좋은 것에 목숨을 걸다가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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