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내가 변하지 않고 누군가를 변화시킨다?

사도행전 10장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 10:45)

사도행전 10장은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복음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경계를 처음으로 넘어간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일가가 세례를 받는 장면이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다른 나라나 다른 문화권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해외 선교, 타문화권 선교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이방인들은 선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유대인은 평생에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에 국한된 얘기였습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성령 세례까지 받았는데,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원이란 이방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유대인 특유의 선민사상과 교만이 고넬료 세례 사건을 통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선교하는 모습을 보면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을 향해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방인들의 변화로 인해 유대인들에게도 거꾸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주셨고, 유대인에게는 자기 종교, 자기 주장, 고정관념, 편견과 교만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교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조차도 선교의 대상이며 선교단체와 교회조차도 변화의 대상일 뿐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누군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교나 전도가 아니라 그저 나랑 똑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나처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나 전도란 사람들을 고작 ‘내 수준’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먼저 변화시키기 위해 믿음이 없거나 약한 누군가를 내 곁으로 이끌어 오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내가 먼저 놀라고 무릎 꿇어야 그것이 나를 통해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먼저 변화시키기 위해 믿음이 없거나 약한 누군가를 내 곁으로 이끌어 오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내가 먼저 놀라고 무릎 꿇어야 그것이 나를 통해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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