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자본주의 윤리와 기독교 정신
사도행전 4장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2)
이 구절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상과 비슷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나 사회주의 둘 다 ‘공동체’의 이상을 지향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어 단어인 Communism (공산주의)와 Community (공동체)만 봐도, 공산주의와 공동체가 표방하는 가치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개인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모습은 마치 공산주의 운동의 분배 원칙이나 공동 소유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탐욕이라는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등장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성령께서 인간의 탐욕을 치유하신 결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 강림의 열매를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산주의는 반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의 열매로 탄생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국가와 정부가 나서서 대신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 정신과 유사한 가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적용 모델로서 매력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도와 법으로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발성’입니다. 자발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나눔과 섬김은 철저하게 자발적이었습니다. 받은 은혜 만큼 나누었을 뿐입니다. 이런 나눔과 섬김이 조금이라도 강제성을 띠게 되면 오히려 억압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불행해집니다.
경외심은 자발성을, 두려움은 반발심을 키웁니다. 인간은 신에게만 경외심을 느끼지, 체제와 공권력에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나눔과 섬김, 평등과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가치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하는 순간 분배(나눔)는 권력이 되고, 평등은 통제가 되며, 정의는 폭력이 됩니다. 이 점이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확연히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천박해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내세웠지만, 기독교 정신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해답입니다. 한없는 용납과 은혜에서 비롯되는 자발적인 나눔과 섬김은 체제와 법으로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