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교회는 ‘마사지샵’이 아니라 ‘메시지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2장

현대의 서비스 산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객 감동’입니다. 고객이 감동해야 소비가 시작되고, 소비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비슷한 감동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고, 목회자의 심방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교우들이 베푸는 친절을 통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소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특정 회사와 브랜드의 상품을 즐겨 소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소비하기 시작합니다. 특정 교회의 목회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감동은 받지만 삶이 바뀌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실 그런 식의 감동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감동은 자기 중심성을 강화할 뿐입니다. 게다가 효과가 일시적이라 중독성이 강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양산한 중독적 종교 소비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주 ‘은혜 받았다’는 말을 쓰는데, ‘감동 받았다’의 교회식 표현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감동과 은혜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감동을 받으면 소비가 시작되지만,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시작됩니다. 은혜는 자기 중심성을 산산조각 냅니다. 그것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은혜 받은 사람의 전형적 반응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찔립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찔리다’는 표현은 70인역 구약성경에 나오는 ‘상한 마음’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마음이 깨지고 산산조각 난 상태(broken heart)를 뜻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지(The message)입니다. 마사지(massage)가 아닙니다. 메시지에 마사지적인 측면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메시지의 본질은 어루만지는 데 있기보다 찌르고 찢는 데 있습니다(히 4:12-13).

교회는 마사지샵이 아니라 메시지 공동체입니다. 마사지가 필요하다면 교회 말고도 좋은 데가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죄의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마사지는 죄성을 더 강화할 뿐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지진이 났습니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가치관 전체가 흔들리자 그들은 심각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찌할꼬” 치열한 고민이 없다면, 나는 교회가 아니라 마사지샵에 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마사지샵이 아니라 메시지 공동체입니다. 마사지가 필요하다면 교회 말고도 좋은 데가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죄의 문제를 다루는 곳입니다. 마사지는 죄성을 더 강화할 뿐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지진이 났습니다. 그동안 갖고 있었던 가치관 전체가 흔들리자 그들은 심각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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