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무엇이 사탄의 일일까요?”
마태복음 16장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베드로는 스승을 보호하려 했을 뿐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데 “예,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싶었고, 예수님께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영적인 기운이나 에너지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앞에서도 사탄은 사탄의 일을 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악령의 대결 구도를 공간적 점유 형태의 대치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영적 존재는 지역색이 없습니다. 지역색이 있으면 그것은 이미 영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나 악령이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영향력의 물리적 유효 사정거리가 있다면 예수님 바로 곁에는 사탄이 얼씬도 못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교제 중이고 대화 중이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보는 눈앞에서 사탄은 역사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사탄을 분별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에게도, 설교 중인 사람에게도, 섬기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기도의 자리에도 사탄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아름답고 위대한 고백이 터져 나오는 자리에 사탄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사탄을 알아보셨습니다. 무엇이 사탄의 일일까요?
십자가 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 입증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취의 영, 자기 옹호의 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길에 있습니다. 목숨을 잃음으로 목숨을 찾는 길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 길은 죽는 길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 입증의 길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입증하고 자기를 성취하고 자기를 계발하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사망의 길이지만, 그 길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사탄은 우리를 속이며 유혹합니다.
사탄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성취의 환상 속에 빠져 있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구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