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긍휼함을 잃은 목자들
스가랴 11장
사람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의 아이들 다툼이나, 가정에서 부부가 싸우는 일이나, 도로 위에서 운전자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이나, 나라가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일이나 본질은 같습니다. 과실률 따지기 아니겠습니까? 내 잘못보다 네 잘못이 크다는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에 가장 취약한 부류는 종교인들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성경에서 발견하기 시작하면 그를 말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말리겠습니까? 본인은 천국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만든 천국 속에서 지옥을 경험합니다.
“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슥 11:5)
종교 지도자들의 심각한 상태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돌봐야 할 양을 사고 팔면서 아무런 죄의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양을 매매해 놓고서는 목양했다고 확신합니다. 자기 합리화가 완성되어가는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런 확신에서 자유로운가? 생각해 봅니다. 위로와 평강을 팔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장사치는 아닐까? 남을 속이다가 자신까지 속이는 탁월한 사기꾼은 아닐까? 아니면 남들이 속아주는지도 모르는 바보일까? 내 처지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감성팔이일까? 두려움과 경각심을 활용해서 사람들을 움직여보려는 양치기 소년일까? 진리를 이용해 실리를 챙기는 바리새인일까? 어디까지가 믿음이고 어디까지가 속음일까? 나는 속고 있는 것일까? 믿고 있는 것일까? 두렵고 떨리는 질문들이 때로는 영혼 전체를 휘감습니다.
스가랴 11장 5절은 당시 목자들에게 없는 것 한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긍휼함이 사라지는 순간, 그때부터는 모종의 거래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위로와 평강을 팔고 마음을 사는 장사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목사든 목사가 아니든, 믿는 모든 이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함이라는 것이 내가 마음 먹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낸 긍휼함은 금방 위선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긍휼함은 나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끊임 없이 공급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