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 머리 터지다
에스겔 17장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투항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벨론에 투항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었을까요?
유다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에 저항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투항은 여호와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벨론의 잔혹함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바벨론의 멸망과 유다의 승리를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왕실과 백성은 선지자들의 말씀에 힘입어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벨론에 저항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시대 유다 백성의 한 사람이었다면 어떤 입장을 가졌을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일은 마치 지도를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낯선 지역에 처음 발을 디디며 그 지역의 지도를 머릿속에 단번에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동네 구석구석을 다녀보고 나서야 대략의 모양새가 그려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내 시야에 한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나의 경험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낯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흘러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앞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유다 백성으로서는 바벨론에 투항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꼼수입니다. 그들이 이집트에 빌붙는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겔 17:15)
바벨론은 애초에 남유다에 불필요한 힘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집트 정벌을 하러 가는 길목의 약소국 따위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유다가 이집트 편에 서자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집트 정벌이 주된 목적인 바벨론을 상대하면서 이집트에 붙어버린 것은 남유다의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바벨론은 시드기야가 부린 꼼수에 화가 나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두 눈에 담긴 마지막 장면이 자기 아들들의 처형이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헷갈리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머리를 너무 많이 쓰지 않는 것입니다. 남유다는 괜히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가 머리가 터진 꼴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