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주워들은 이야기 말고, 내 이야기, 내 고백을…
에스겔 30장
도둑이 누군가의 집에 침입했다가 그 집 주인이 검찰이나 경찰의 고위 관계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주차장에서 불미스러운 마찰로 얼굴을 붉혔던 상대방이 알고보니 내가 취업을 희망하는 회사의 인사 담당자였다’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30:8) 에스겔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타락했을까요? 그들은 왜 그토록 수모를 당해야 했을까요? 본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권리로 알다 못해 하나님을 호구로 알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이방신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살아야 할까요? 어차피 세상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지식을 다 섭렵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선택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몰라도 되는 것을 너무 자세히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낭설들부터 각종 범죄수법, 굳이 알 필요 없는 타인의 사생활까지, 알면 알수록 인생이 복잡해지는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바울의 고백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보니 그동안 너무 쓸데 없는 것을 많이 알고 지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알아야 할 분을 알고 나서 인생이 단순해졌습니다. 방향이 명확해졌습니다. 태도가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한 번 더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15)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 말고, 내 이야기, 내 고백을 주님은 듣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요? 나는 내가 믿는 그 분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