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한분 하나님께 몰입하고, 그분을 경외하고 섬길 때…
예레미야 11장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렘 11:12-13)
남유다에는 도시의 개수만큼이나 그들이 믿는 신들이 즐비했습니다. 믿는 신이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결국 아무 신도 못믿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신을 믿자니 저게 불안하고, 저 신을 믿자니 이게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 신도 믿고 저 신도 믿으면서 한 신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신이 보완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요?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물건들을 담아놓고 가격과 성능을 비교하며 저울질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제품을 사자니 기능이 아쉽고, 저 제품을 사자니 가격이 아쉽고, 또 다른 것을 사자니 디자인이 아쉬운 상황과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다양한 신을 믿는 것은 포용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이 여자도 사랑하고 저 여자도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람만을 선택한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이것이 왜 십계명의 제 1계명이겠습니까? 더 많은 신을 믿을수록 인간은 더 불안할 뿐입니다. 한분 하나님께 몰입하고 그분을 경외하고 섬길 때 인간은 불안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한없는 평안과 만족은 믿을 만한 참 신 이외의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믿을 만한 신이 아니라 믿고 싶은 신을 믿기 시작하면 만족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일이 점점 수월해지는 세상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믿고 싶은 것과 믿을 만한 것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 아닐까요? 성경은 그 지혜를 제공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