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고쳐쓰기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게 하다
예레미야 9장
지옥은 저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지옥을 선물했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고, 형이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가정에서 그들이 맛보았던 것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 시절, 유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렘 9:4) 이웃을 조심해야 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믿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길에서 누군가가 내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불신이 사회 전반에 번지게 되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이웃을 경계해야 하고 형제를 믿어서는 안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맛보는 것은 천국은 아닐 것입니다.
이 사회가 과연 개선될 수 있을까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규정을 만들고 또 만들면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신뢰와 질서가 다시 회복될까요?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고쳐쓸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도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끊임 없는 발전과 개선, 수정을 시도하고 있지만 과연 사람들이 꿈꾸는 좋은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유토피아든, 그 유토피아의 건설을 주도한 사람들에게나 유토피아일 뿐이지 다른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좌가 만든 천국을 우는 지옥이라 하고, 우가 만든 천국을 좌는 지옥이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셔야 천국입니다. 천국은 개선하고 발전해서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쓰시기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게 하십니다. 거듭나게 하십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 사회를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기 전에 천국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천국을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을 누리는 방식이 조금 바뀌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