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맹신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시편 77편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시 77:8)

시편 77편을 지은 시인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에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점점 약해진 것일까요?

아이가 사춘기를 거치며 어른의 면모를 갖추듯 신앙 생활에도 사춘기와 같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 중에 의심은 성장통처럼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입니다.

의심도 질문도 갈등도 궁금한 것도 없는 믿음, 예쁘게 박제된 믿음은 맹신일 수 있습니다. 맹신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이고 확고한 믿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내가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중요해서 내 안에 자연스레 발생하는 의문과 갈등을 불안 요소로 간주하고는 싹을 잘라버립니다.

바른 신앙이란 내가 믿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입니다. 관심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관심이 없으면 질문도 없습니다. 따라서 맹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한한 하나님의 활동이 유한한 인간에게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먼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의구심 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시인의 이러한 반응은 무한자의 활동이 유한자에게 의심이라는 방법으로 포착된 것입니다. 시인은 의심의 여지를 포괄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질문을 마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문자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길을 잃을까요?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내가 답을 하려다 길을 잃는 것입니다. 빈칸을 남겨둔 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직접 그 빈칸을 채우십니다.

질문을 질문으로 남겨 놓고, 의심을 의심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까 내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오답을 정답이라고 철떡같이 믿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이란 내가 믿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입니다. 관심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관심이 없으면 질문도 없습니다. 따라서 맹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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