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죽고 싶었던 이가 살아서 부르는 노래
시편 88편
“고라자손의 찬송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시 88, 표제어)
클래식 음악에서 mesto라는 악상 기호가 있습니다. ‘침울하게, 비통하게’ 연주하거나 노래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88편의 표제어에 나오는 ‘마할랏르안놋’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슬픈 감정을 살려서 부르도록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시편 88편은 흔치 않은 시편입니다. 찬양이나 소망이 조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가지 탄식과 절규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며, 기력을 다 잃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 몸은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버림을 받아서,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습니다.”(시 88:3-5, 새번역)
시편을 통틀어 가장 암울한 고백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지치고 힘이 들거나 우울해지면 그 상황을 극복하고자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달콤한 음식을 찾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여행을 하거나,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거나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존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런 욕구마저도 좌절된 상태가 있습니다. 무기력입니다. 무기력은 살고 싶은 욕구마저도 무력화시키고는 우리 안에 죽음의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무기력은 무無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며, 무덤의 인력입니다. 시편 88편은 무기력의 지배 속에서 스올로 걸어들어가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단념하기 직전에 내뱉은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런 암울하고 어두운 내용이 어떻게 시편의 한면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이 시인이 죽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는 소망도 찬양도 위로도 구원의 신호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고백이 노래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소망이자 위로요, 은혜입니다.
시편 88편은 ‘힘 내’, ‘하나님이 도와주실거야’, ‘다 뜻이 있겠지’ 이런 얘기가 아무 소용이 없는 이들을 위해 남겨진 노래입니다.
나의 눈물 자국이, 내가 고통 속에 몸부림쳤던 흔적이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소망이고 위로일 수 있습니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던 내 삶의 일부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의미이고 생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야 하는 의미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