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묵묵히 제 길 걷는 경찰들…영국도, 한국도 그리고
영국 근대경찰은 애초 정복경찰관만으로 출범한다고 약속했다. 범인 잡으러 가면 유니폼 보고 도망쳤다. 주위 사람들은 정부 앞잡이라며 돌과 오물을 던졌다.
사복경찰관 즉 형사를 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런던경찰은 창설 후 13년 지나서 슬그머니 수사계(Detective Branch)를 만들었다. 알려지면 정부가 스파이 고용했다고 난리칠 분위기였다. 조용조용 조심조심 일했다.
35년을 탈 없이 보냈다. 한 세대 지났다. 정착하는 듯 보였다. 방심한 탓인가, 사고가 터졌다. 세 형사가 사기범으로부터 돈을 챙겼다. 수사내용을 알려준 것이다. 외국으로 도주해 네덜란드 경찰한테 붙잡혔다. 뇌물 건을 실토했다. 발칵 뒤집혔다. 형사들은 2년 중노동형을 받았다.
영국 당국은 대책을 서둘렀다. 관계자를 프랑스에 보내 배워 오도록 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1878년 수사과(CID, Criminal Investigation Department)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영미계통 국가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다.
프랑스는 전과자를 형사로 고용, 전과자 정보원을 이용해 범죄자 잡는 방식을 시작했다. 비독(Vidocq)은 그렇게 해서 1813년 국가수사경찰 책임자로까지 출세했다. 경찰 내부 반발과 국민여론으로 물러났다. 재야에서도 그 습성 버리지 못해 또 감옥에도 갔다.
영국이 배우러 갔을 때는 전과자 수사관들이 빠져나간 때였다. 그러나 정보원을 이용하는 습성은 여전했다. 일본제국 경찰도 도입했다. 형사세계에 뇌물과 정보원이 자리 잡게 된 연유다.
다른 길 걸은 곳도 있다. 한국의 박수로 조사관은 미결사건이 75건이나 됐다. 오줌이 안 나오는 지경이라며 걱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해나갔다. 인생도 뒤지지 않았다. 아들 서울대 보내고 경위로 끝냈다. 연금이야 부족하다. 그런대로 노후 보낸다.
이종철 형사는 1984년 근속승진 제도가 도입된 첫 해에 순경 20년차로 경장됐다. 1999년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 도굴사건 해결로 경위로 특진했다. 그 계급으로 퇴직했다. 아들과 며느리도 경찰관이다. 편안하다.
내가 아는 형사들이다. 승진이 너무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증거 쫒아 진실 찾아나가는 고독한 여로旅路 걸었다. 한눈 팔지 않았다. 마음속 신전(temple in mind)에 정의 모셔놓은 사람들이다. 돈과 권세에 휘둘리지 않았다. 영혼의 독립 지켜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