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칼럼] “죽는 날까지 야구 불모지 라오스·베트남에 꿈나무 키울 것”

라오스 선수들과 함께 한 이만수 감독(둘째 줄 가운데) 

라오스에서 야구를 뿌리고 내리고 있는 제인내 대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야구와 상관없이 평생 공부와 사업을 했던 사람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베트남야구협회(VBSF)를 지원하는 이장형 단장은 교직에서 학생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처음 제인내 대표를 알게 된 것은 2013년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난 11월이었다. 2013년도는 필자가 SK 와이번스에서 감독 2년차가 되던 해였다. 그 해 50년 야구 인생에서 늘 높은 곳에 있던 내게 팀 순위 6위는 상상할 수 없던 초라한 성적이었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6위의 성적은 선수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제인내 대표(왼쪽)와 이만수 감독

이 힘든 타이밍에 제인내 대표의 전화가 걸려왔다. 라오스에서의 일과 자신의 삶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다.

베트남 이장형 야구협회 지원단장은 라오스에 야구가 어느 정도 정착되던 2018년 1월 말에 베트남에서 야구선수들을 이끌고 한국·라오스 국제 야구대회에 출전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서 2013년 11월 처음 제인내 대표와 연락이 닿은 후 벌써 10년이 되었다. 2014년 10월 말 SK 와이번스에서 3년의 감독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했다. 그리고는 조촐한 가방 하나 챙겨 어디에 위치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라오스로 향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라오스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가 지금도 많이 생각난다.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19년 12월 26일이 이르러서였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어떤 감정인지 모를 웃음이 나온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16년간 프로선수로 활동하고 은퇴식도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도망치듯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기억. 그때처럼 힘든 감정을 추스르고 또다시 낯선 라오스로 향했다. 미국에 갔을 때가 41살이었다. 아직 젊었고 새로운 도전을 겁내지 않을 나이였다.

그러나 프로야구 감독을 했던 내가 동남아시아 최빈국 라오스에 야구 보급을 위해 간다는 것은 젊지도 않고 새로운 도전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나에게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2019년 12년 30일 하노이에서 만난 이장형 지원단장에게 베트남 야구 보급을 함께 하겠노라고 약속한 것도 참 무모한 것이었다.

40도가 넘는 날씨에 야구의 ”야“자도 모르고 슬리퍼를 신고 운동장에 나온 라오스 친구들이 생각난다. 야구와 축구를 착각해서 야구공을 발로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질 뻔했고, 훈련 시간을 알려주면 본인들이 원하는 시간에 나와 훈련하는 이들을 보면서 과연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회의가 들기도 했다. 라오스에 야구는 불가능한 스포츠였다. 아니 이렇게 더운 날씨에 누가 야구를 하기 위해 땡볕에 운동장에 나오겠는가?

하루 연습했다가 힘들면 다음 날에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다. 정부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 야구를 가르친다는 소문에 감시카메라로 찍어서 당국에 보고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잠시 야구만 가르치고 두번 다시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 같이 야구를 하면서 닫혔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같이 하는 사람이 없어도 나는 해맑은 아이들의 마음과 눈을 보게 되었다. 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보며 세상 때가 많이 묻었던 나의 마음이 오히려 이들로 인해 조금씩 씻겨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능하다는 의지를 갖고 한번 이들과 부딪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메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금세 물이 증발해서 마르는 것처럼 의미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수시로 한국과 라오스를 왕래하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야구를 하는 동안 메마른 땅 같아 보이던 라오스 야구에 작은 싹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낯선 라오스 땅에 날아가 야구를 보급하니 가장 잘 도와줄 것 같던 교민들이 오히려 모함과 누명을 씌워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거기다가 라오스 정부는 생소한 야구를 가르치는 우리를 경계하며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하기 위해서는 이들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문을 두드렸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라오스 고위 공무원을 만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설득과 기다림에 정부 관계자의 태도 또한 협조적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야구장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라오스 대통령으로부터 상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라오스의 경험을 통해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이렇게 시작된 인도차이나반도의 그 두번째 여정. 베트남에 처음 야구를 보급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쉽게 생각했다. 라오스와 다르게 많은 교민이 있어 도움 받는 것이 훨씬 수월해서 야구 보급이 더 잘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박항서 감독을 통한 스포츠 외교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했기에 한국 야구의 우수성을 베트남에 이식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이고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나의 오판이었다. 누워서 떡을 먹다가는 쉽게 체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베트남도 야구 전파 과정이 똑같이 어렵다는 것을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베트남을 위한 야구 관련 행사를 개최하는 데에도 온갖 행정 절차와 허가 등을 받아야 했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야구를 돈벌이 또는 자신의 사익을 챙기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고 이들은 순수한 야구 전파를 이권인 양 음해하고 모함을 일삼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면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참 대처하기 힘든 일이다. 야구를 가르치는 일보다 사람관계에서 겪는 갈등으로 비롯된 스트레스는 참 견디기 힘든 것이다.

라오스 제인내 대표와 마주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담소를 나누면서 그가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감독님. 미리 알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솔직히 누군가는 대단한 끈기와 열정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만 고백하건대 몰랐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 서로가 나누는 무언의 위로였다.

이장형 베트남야구 지원단장(왼쪽)과 이만수 감독

요즘 이장형 베트남 야구 지원단장은 그의 본업인 교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베트남과 매일 소통하며 야구 지원일을 하고 있다. 학교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퇴근 후에 베트남 야구 일을 진행하는 그 또한 앞으로 주어진 베트남 야구 발전의 과정을 몰랐기에 지금껏 달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눈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많은 이슈가 생기고 있는 베트남 야구를 시작하면서 혼자 조용한 시간에 지난 세월을 복기해본다. 나에게 또다시 이런 과정들이 온다면 지금처럼 온 정성을 다해 똑같이 야구를 보급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절대 못 할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대답은 “힘들어도 이 길을 갈 것이다“라고 고백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나에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그 누구나 다 하고 싶은 일은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이지만,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가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이뤄낸다면 후회없는 선택이라고 믿는다.

혼자였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의 수고와 사랑에 감사를 드린다. 힘듦을 알고 베트남 야구를 시작했다. 내 사명이며,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기에 운명처럼 베트남과 동행을 선택했다. 누구나 이 일을 할 수 있었고, 쉽게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나는 후회 없이 이 일을 끝까지 해낼 것이다.

라오스와 베트남에 야구를 보급시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변의 동정 어린 시선과 안타까움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렸다가 그 바위가 다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또 그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올리는 시지포스와 라오스와 베트남 야구 전파를 하는 내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의지이다. 야구 전파는 메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금세 물이 증발해서 마르는 척박한 땅에 끊임없이 물을 뿌리고 씨앗을 심는 것이며 또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메마른 땅은 언젠가 미세한 물을 품게 되어 생명이 싹틀 수 있는 조건을 만들 것이며, 바위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작은 흠집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 메마른 땅에 물을 붓는 수고를 기꺼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에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 씨앗은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이 틀 것이고 열매를 맺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베트남 야구협회(VBSF) 초대회장 쩐 득 판(Tran Duc Phan)과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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