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81] 6.25 전쟁 중 실시된 첫 지방선거

1961년 초대 민선 서울시장 취임식. 

제1차 동시지방선거는 1995년에 실시됐지만 우리나라 첫 지방선거가 치러진 건 1952년 4월 25일이었습니다. 전쟁이 소강국면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한창 한국전쟁을 치르던 중이었습니다. 수도는 부산으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핑계로 연기되었던 지방선거를 불쑥 치른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제헌 헌법에서 지방자치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지방자치가 바로 시행된 것은 아닙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헌법 제97조)고 했는데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방자치법은 헌법 제정 거의 1년만에야 제정(1949년 7월 4일)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당시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를 서울특별시?도와 시?읍?면의 두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군은 도와 읍·면의 연락기관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임명제였고 시?읍?면장은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는 지방자치법이 개정(1949.12.15)되면서 치를 수 없었습니다.

의회 구성 때까지 시?읍?면장은 임명제로 하고, 의회의 기능은 상급행정기관이 대행하도록 지방자치법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정부 수립 이후 여러 가지 행정 체제의 미비와 국내 치안상태가 불안하다는 것을 구실로 지방의회의 구성을 미룬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지방자치 실시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전쟁으로 치안은 더욱 불안해졌고, 행정체제도 정비는커녕 식민지시대의 지방관제가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도저히 선거를 치를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1952년 2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지방선거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국회에서 부결시킨 개헌안에 대한 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국회에서 부결시킨 개헌안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11월 29일 제출한 것으로 대통령 직접선거와 국회 양원제가 골자였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했습니다. 헌법절차에 따른 국회 간선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실정과 전쟁에 대한 책임도 컸고, 1950년에 구성된 2대 국회가 여소야대 국회였기 때문입니다.

국회 간선으로는 대통령에 연임되기 힘들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을 국민직선제로 바꾸려 하였습니다. 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18일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었습니다. 반대가 143표에 찬성은 19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 정치탄압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2월 15일에 피난 수도 부산의 거리마다 국회의원 소환을 요구하는 벽보가 나붙었습니다. 백골단이나 땃벌떼 등 정체불명의 괴단체 이름으로 붙여진 이 벽보의 내용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부산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반대한 국회의원에 대한 소환결의대회가 벌어졌습니다.

투표장에 들어서는 유권자들

4월 17일 야당 의원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다음날에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내각제 개헌안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처럼 정국이 어수선하고 불안해진 상황임에도 4월 25일 시·읍·면 의회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와 여당이 철저한 통제 아래 밀어붙인 겁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치안이 불안하던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강원도, 지리산 부근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2주 뒤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치러진 첫 번째 지방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유지를 위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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