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77] 자유당정권서 첫걸음 잘못 뗀 지방자치

1954년 이른바 4사5입 개헌 투표 현장. 자유당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의회민주주의를 하나둘 파괴해 갔다. 지방자치제도 역시 정권을 잡기 위한 수단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에 이용됐던 제1대 지방의회 임기가 끝나기 직전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었습니다(1956.2.13). 시?읍?면장의 선출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고쳤습니다. 명분은 주민에게 자치권을 돌려준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유당이 이미 지방조직까지 다 정비해 놓아서 직선제가 유리할 것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또 지방의회의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불신임 결의권과 지방자치단체장의 지방의회 해산권을 폐지했습니다. 지방의회 의원과 시?읍?면장의 임기를 종전의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고, 지방의회 의원의 수도 10% 가량 줄였습니다. 의회 개회일수도 제한하고, 의회 결정에 대한 단체장의 거부권을 신설하였습니다.

제2차 지방선거는 5월로 예정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치른 뒤 8월 8일에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7월 8일에 지방자치법이 다시 개정되었습니다. 개정된 법을 시행해 보지도 않고 다시 개정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건 지방선거를 그냥 치르면 자유당이 불리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3대 정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졌을지도 모릅니다. 부통령은 장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또 선거과정에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야당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대로 시?읍?면장 선거를 치르면 자유당이 대패할 것으로 점쳐졌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자유당은 지방자치법을 뜯어고쳤습니다. 8월까지 4년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는 시?읍?면장은 잔여 임기를 인정해 제2차 지방선거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위법성을 들어 야당이 반대했지만 자유당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야당의원이 총퇴장한 가운데 자유당 의원만으로 표결을 강행해 통과시켰습니다.

제3차 개정의 결과로 전국 시?읍?면장의 60%가 선거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시장 선거는 26곳 가운데 6곳, 읍장선거는 76곳 가운데 30곳, 면장 선거는 1,389곳 가운데 544곳에서만 치렀습니다. 시?읍?면장의 임기만료일이 서로 달라, 그 뒤 지방선거가 수시로 치러지는 바람에 정치적 중요성도 떨어지고, 주민들의 관심도 낮아졌습니다.

1956년 8월 8일 시?읍?면장 선거와 시?읍?면의회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습니다. 의회 간선으로 선출하던 시?읍?면장을 주민 직선제로 바꾸면서 주민이 처음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시.읍.면장 선거는 전국 1,481개 시?읍?면 가운데 580곳에서, 시.읍.면의회 선거는 기득권을 인정받은 25곳을 제외한 1,456곳에서 실시되었습니다.

8월 13일에는 제2차 시?도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서울특별시를 비롯 10개 도에서 의원 437명을 선출했습니다. 의회를 처음 구성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은 47명, 나머지 9개도 의회 의원은 390명이었습니다. 투표율은 전국 평균 86%인데, 서울시가 75%로 가장 낮았고, 제주가 99%로 가장 높았습니다.

선거 결과 자유당은 시장과 시의원은 각각 33.3%와 37.7%, 읍장과 읍의원은 26.7%와 51.5%, 면장과 면의원은 51.8%와 69.6%, 도의원은 63.6%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서울시의회 47석 가운데 자유당은 단 1석을 얻는데 그치는 참패를 했습니다.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85.1%인 40석을 차지했습니다.

관권개입도 매우 심해 야당 출마자에 대한 경범죄 남용, 등록 방해, 입후보 사퇴 강요 등으로 3800여명의 후보가 사퇴했습니다. 무투표 당선자가 20%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유당이 막무가내로 법을 뜯어고치고 관권을 동원하면서 제2차 지방선거 역시 중앙정치에 휘둘렸던 ‘지방 없는 지방선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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