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80] 권력에 휘둘린 우울한 첫걸음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 가결 장면

지역마다 상황이 다르고, 주민들의 요구가 다양해져 자치와 분권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졌지만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이 효율적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중앙정부가 각종 권한과 재정을 틀어쥐고 고도성장을 이끌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에 끌려 다녔습니다. 중앙정치의 필요에 따라 시행되거나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지방선거인 제1차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1952.4.25)의 투표율은 91%였습니다. 2주 뒤에 치러진 제1차 시․도의회 선거(1952.5.10) 투표율은 81%였습니다. 무투표 선거구의 유권자는 모두 투표했다고 간주한 숫자입니다.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방의회 의원 17,850명 가운데 순수 야당은 민국당의 39명뿐으로 겨우 0.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당인 자유당은 4,591명으로 25.7%를 차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추종세력인 국민회와 한청이 각각 2,653명(14.9%), 2,877명(16.1%)을 차지했습니다. 무소속이 7,554명(42.3%) 당선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관의 지시를 순종하는 지방 유지들이었습니다. 당선자의 직업은 농업이,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광복과 건국을 거쳐서 6.25를 치르는 동안 반정부 인사들은 대부분 좌익이 되어 죽었거나 월북(또는 납북)되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도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과 밀착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지방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할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있었다 할지라도 거의 입후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구성되었으니 지방의회가 정부 여당이 의도하고 조종하는 대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는 부결되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부분적으로 수정해 5월 14일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에 맞춰 5월 18일 전국 각 시․읍․면 의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찬성’을 의결해서 결의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지방의원들은 국회 즉시해산과 총선거를 요구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 개헌안을 지지하는 ‘현 국회 해산선포 전국 지방의원 대표자대회’, ‘국회해산 성토대회’ 등을 잇달아 열었습니다. 국회해산과 총선거, 대통령직선-양원제 개헌안의 지지를 결의하고 대통령에게 결의문을 전달한 지방의회의 수는 659개에 이르렀습니다.

지방의회 대표들은 부산에서 전국대회를 열어 지방의회가 “지방민의 참다운 여론을 반영하는 유일한 기관”이라며 “국민의 신망을 완전히 상실한 현 국회를 즉각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편지를 트루먼 미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1천3백여 명의 지방의원이 “민의에 위반하는 국회를 조속히 해산하라”며 대통령 관저 앞에서 단식농성도 했습니다.

7월 4일 밤 국회가 열렸습니다. 국회는 정부와 국회가 제출한 개헌안을 발췌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출석하지 않은 야당의원들을 연행해 국회에 강제 출석시켰습니다. 기립표결로 찬반투표를 진행한 투표 결과는 출석 169명 찬성 166명 기권 3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발췌개헌입니다.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지방의원들이 개헌안 통과에 노고가 많았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지방의회 의원들은 귀향했습니다. 개정헌법에 따라 8월 5일에 실시된 첫 번째 직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처럼 첫 지방선거는 지방자치의 참뜻을 살리지 못하고 중앙정치의 목적을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지방의회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지방의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향한 충성경쟁에 몰두했습니다. 중앙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방자치를 시행했고, 권력이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지방자치에 대해 ‘비능률, 낭비, 혼란’의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박정희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지방자치를 중단시킨 명분으로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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