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 선관위 자부심 되찾길
K형, 늘 형 생각을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서야 이렇게 자판을 두드립니다. 모처럼 전하는 소식에 조금 거북한 얘기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주면 고맙겠습니다.
형이 30년 이상 청춘을 바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비판 기사가 요즘 자주 등장해 편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7년 됐죠? 과천에서 저녁 같이 하며 형의 울분 섞인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형, 80년대 중반 처음 중앙선관위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존재감도, 긍지도 없었어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불법인 줄 알면서도 아무 이의도 달지 못하고, 참 부끄럽기만 했다오. 그러다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이 백기를 들고 실시된 19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사건, 1992년 이지문 중위의 군부재자 부정투표 폭로 등을 거름삼아 선관위는 공정선거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오. 금품이나 흑색유인물 살포 같은 부정 사례 고발이 들어오면 현장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조사도 하고···. 얼마나 뿌듯했는데요. 이형도 아시죠? 농협 조합장 선거부정 말예요. 근데 우리가 나서면서 많이 바로잡아졌거든요. 선후배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우리 선관위가 대한민국 풀뿌리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어요. 공무원 발령 받아 선관위 떨어졌을 적의 낭패감이 어느새 싹 씻겨나갔지요. 기자이신 이형도 그 느낌 잘 아실 겁니다.”
K형, 최근 20대 대선 사전투표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두고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벌어져 근심이 많겠군요. 형이 현장을 떠난 지 몇년 지나지 않았기에 더욱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더하겠지요. 코로나 확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한표를 행사한 국민들의 표를 바구니 같은 곳에 담아 소홀히 다룬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나는 이번 일이 고의보다 실수에 의해 생긴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올해초 청와대의 선관위 상임위원에 대한 부적절한 연임 인사에 반대해 선관위 직원 거의 전수가 연판장을 돌리며 반대하는 의기(義氣)를 봤기 때문입니다. 형도 알다시피 선관위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이뤄내려는 직원들의 용기에 국민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기억나지요? 우리나라 선거관리는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그대와 내가 의견일치 봤던 것을. 형의 귀뜸을 받아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을 만나 보석함을 받고 네팔, 인도네시아 등 최고위급 인사들에 전달했던 일을. 그들은 “한국의 완벽한 선거관리 체제와 방법은 우리가 가장 먼저 배우고 싶은 것”이라고 얘기하더군요. 실제 이들 나라는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랬던 우리의 선거관리와 선관위 운영이 최근 몇년 사이 불신과 의심을 받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2020년 4월 총선에서도 일부 국민들은 사전투표와 관련해 의혹을 제기했는데, 엊그제 또 사전투표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4, 5일 일부 투표소에서 발생한 일들과 부천 선관위의 CCTV 회로가 종이로 가려진 것 등은 국민들 의혹을 살만한 일이었습니다. 국민적 불신은 형이 30년 피땀 흘려 이룩한 선관위의 명예와 자존감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말 못할 사정과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겁니다. 3000명 채 안 되는 인력이 전국 1만4464개 투표소를 담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부천선관위처럼 전국 대부분 지역선관위가 마땅한 공간도 없이 남의 사무실을 빌려 쓰느라 위원들이 회의 한번 터놓고 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지요. 더욱이 비상근인 중앙선관위원장이 출근하지 않았다고 닥달하는 게 못마땅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나 억울함은 일단 내일 본선거를 마친 뒤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K형! 내일 2022년 3월 9일, 형이 7년 전 내게 울분을 토하던 그 자부심을 선관위 3천 후배들이 되찾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거리에서 함성으로만 이뤄진 게 아님을, 감옥에 간 투사만이 주인공이 아니었음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하지 않겠어요? 국민들이 선관위의 진정한 존재의미와 역사성을 깨닫고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K형과 선관위 후배들이 그 역할을 해주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코로나도 좀 가라앉고 라일락꽃 필 때 즈음 “3월 9일 우린 또 해냈어요” 하는 형의 선관위 후배들 자랑, 또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