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21]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발
자본주의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 개념의 하나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정치도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입니다. 정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면 최순실이라는 이름부터 떠올리는 시민이 적지 않을 겁니다. 박근혜 탄핵의 진원지가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이기 때문입니다.
최순실은 ‘선출되지 않은 비선 실세’였지 ‘보이지 않는 손’은 아닙니다. 박정희 독재를 뒷받침했던 중앙정보부나, 전두환 독재의 뒷배였던 보안사령부와 안기부도, 문민정부 이후 힘이 세진 정치 검찰도 ‘보이지 않는 손’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선거에서 표로 나타나는 ‘시민의 선택’입니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시민의 선택’은 정치의 방향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습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사상 처음으로 야당 득표율(신민당 32.8%)이 여당(민주공화당 31.7%)보다 높았던 선거였습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했던 유신체제라 박정희 독재가 유지되었지만 시민의 마음은 유신체제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유신 체제에서 위축됐던 야당은 유신을 거부한 ‘시민의 선택’을 등에 업고 유신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철승 총재가 물러나고 김영삼 총재가 강경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여당은 김 총재를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제명시켰습니다. 시민의 분노로 부마항쟁이 터졌고, 유신체제 내부의 갈등이 마침내 10.26으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유신 붕괴가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가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계엄 상황에서 ‘대통령 단임제’를 내세운 개헌을 통해 합법의 외피를 둘렀습니다. 광주의 끔찍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특전사와 최루탄’에 기대어 독재를 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2.12총선에서 시민들은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을 제1야당으로 선택했습니다. 정권에 끌려다니던 ‘관제야당’ 민한당은 해체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두환 공포정치를 거부한 ‘시민의 선택’에 힘을 받은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가 시민과 함께 ‘장외투쟁’을 벌였습니다. 민주화 요구를 경찰력과 최루탄으로도 막지 못해 마침내 독재정권은 두 손을 들었습니다. 양김의 분열로 민선군부정권(노태우 정부)이 들어섰지만 여소야대를 만든 ‘시민의 선택’으로 민주화 흐름은 지속됐습니다.
정치는 ‘시민의 선택’이 반영된 선거 결과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선거 승리를 위해 각 정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선거 때마다 돈이나 지역감정, 색깔론, 흑색선전 등이 판치는 것도 시민의 선택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흔들리는 경우도 있으나 ‘보이지 않는 손’의 선택은 대체로 합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발(invisible foot)’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발’은 프랑스 경제학자 랑글로와가 처음으로 쓴 용어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움직이지만 ‘보이지 않는 발’이 시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을 시장 밖으로 차낸다고 합니다. 1985년 2.12 총선 때 관제야당으로 불리던 민한당의 패배가 바로 ‘보이지 않는 발’의 작용이었을 겁니다.
비호감도가 높고, 네거티브가 판을 치는 선거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에 의해 쫓겨나는 후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정치가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의 꿈을 주는”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 역시 ‘보이지 않는 발’이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비전과 가치, 이념과 정책으로 시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후보들도, 정당들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