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23] 윤석열-안철수 단일화의 마지막 고비, 가치 연대

안철수(왼쪽) 후보와 윤석열 후보

대선 후보 등록 첫날 정국은 단일화 문제로 출렁거렸습니다. 단일화는 없다면서 완주 의지를 되풀이해서 밝혔던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공식 제안한 것입니다. 안 후보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운 구체제 종식과 국민 통합, 미래를 위해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의 비전을 모두 담아내는 ‘연대이자 연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더 좋은 압도적인 승리”는 “국민적 명분과 합리적 단일화 과정”으로만 가능하다면서 단일화 방식으로 여론조사에 따른 국민경선을 제시했습니다. 안 후보와 오세훈 시장이 지난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이룬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국민의힘은 ‘역선택 가능성’을 내세워 여론조사 경선방식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이 밀당을 하겠지만 단일화 가능성은 아직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28일 투표용지가 인쇄되므로 단일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경선방식에 대한 이의제기지만 국민의힘이 ‘통 큰 단일화‘가 필요하다며 ‘용기 있는 결단’을 촉구한 것은 결국 안철수 후보의 양보를 요구한 것입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가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만이 아닙니다. 2010년 지방선거 때 ‘반MB’를 고리로 추진됐던 야권단일화가 상당한 성과를 거둔 이후로 각종 선거에서 후보단일화 논의가 빠지지 않습니다. 절대적 우세가 아니면 단일화는 더욱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단일화가 민주화 이후에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때 군부정권을 꺾는다는 명분으로 윤보선-유진오 단일화가 이뤄졌고, 아예 합당까지 해 유진오 총재-윤보선 후보의 신민당이 탄생했습니다. 선거 패배로 민간정권 수립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반군사독재진영은 하나로 뭉칠 수 있었습니다.

20년 만인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군부정권을 꺾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단일화가 추진됐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민선군부정권이 들어섬으로써 정권교체도 실패했습니다. 민주진보진영은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후단(후보단일화)파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비지(비판적 지지)파로 갈라졌습니다.

그 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1992년 제14대 대선(1992년)을 빼고는 대선을 치를 때마다 후보 단일화가 추진됐습니다. 단일화는 제15대 대선(1997년 김대중-김종필)과 제16대 대선(2002년 노무현-정몽준) 두 번 이뤄졌고, 두 번 다 당선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DJP는 협상을 통한 단일화였고, 노-정단일화는 여론조사 방식을 통한 단일화였습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문재인-안철수 단일화가 추진되었습니다. 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안철수 후보가 느닷없이 사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는 단일화의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갈등을 안은 채 한쪽이 포기하면서 이뤄진 ‘2%가 부족’한 단일화였기 때문입니다. 안 후보는 문 후보 지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DJP 단일화는 선거 46일 전에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훨씬 전부터 신뢰를 쌓기 위한 양당 공조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선거 24일 전에 극적으로 성사되었습니다.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해선 자신이 단일화 후보가 되지 못해도 좋다며 정몽준 후보쪽의 단일화 조건을 다 받아들인 노무현 후보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양당은 단일화 성사를 위해 양보할 건 양보하고, 타협할 건 타협할 겁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당성 없는 단일화만으로 시민의 지지도 대선의 승리도 담보되는 건 아닙니다. 비전과 정책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가치 연대하는 모양새를 갖춰야 할 겁니다. 물론 단일화 성사 자체도 현재로선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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