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26] 2차 TV토론이 기다려지는 까닭
이념의 정치, 상황의 정치
우리 정치는 ‘이념의 정치’라기보다는 ‘상황의 정치’ 경향이 강합니다. 이념의 정치란 이념과 가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정책 중심의 책임 정치를 말합니다. 각 정당 정파가 특정한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모이고, 또 그 이념과 가치를 바탕으로 정책과 공약을 내세워 시민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정치가 바로 이념의 정치입니다.
상황의 정치란 그때그때 벌어지는 상황에 끌려가는 정치입니다. 상황의 정치에서는 하나의 사건이 터졌을 때 정당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정국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OO 리스트’가 나오거나 ‘OO 게이트’가 터지면 진위여부와 무관하게 그 게이트에 매달리는 게이트 정국이 됩니다. 다른 정치 이슈들이 블랙홀처럼 게이트에 빨려들어 갑니다.
우리 정치와 선거가 역동적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 정국과 선거판을 출렁거리게 만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 5년 내내 유지됐던 ‘이회창 대세론’이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노풍’에 꺾인 게 대표적입니다. 한때 흔들리던 ‘노풍’은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 단일화로 다시 살아나 마침내 이겼습니다.
이념과 가치가 전혀 달랐던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가 바로 상황의 정치의 산물입니다. 정치적 색깔이 거의 없던 정 후보가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 힘입어 갑자기 유력 후보로 떠오른 것도 상황의 정치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번 대선도 한 달이 채 안 남았지만 어떤 일이 터지고, 그 일이 선거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의 정치는 선거철에 그 성향이 더욱 강해집니다.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고 거기에 맞는 정책과 공약을 내세워 시민의 지지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 당과 상대 후보의 약점을 부풀려 공격하기에 바쁩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사건이 상대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거기에만 매달립니다. 네거티브라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대장동 의혹이 불거졌을 때 모든 정치활동은 대장동 의혹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일 년 동안 나라살림살이를 잘했는지 따져보는 국정감사는 대장동 감사가 되었습니다.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실체를 밝혀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장동 의혹이 다뤄졌습니다. 국정감사는 ‘이재명 후보를 공격하라’와 ‘이재명 후보를 지켜야 한다’는 공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념의 정치가 생각 있는 정치라면 상황의 정치는 생각 없는 정치입니다. 이념의 정치가 내일을 짐작할 수 있는 정치라면, 상황의 정치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입니다. 이념의 정치는 시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깨끗하게 물러나는 책임 정치입니다. 상황의 정치는 그 상황만 모면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무책임한 정치입니다.
선거는 어제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심판의 기회입니다. 동시에 내일에 대한 희망을 선택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반드시 해야 하지만 후보들이 어떤 비전과 가치를 갖고 있는지, 어떤 정책을 약속하는지도 꼼꼼히 챙겨볼 일입니다. 우역곡절 끝에 성사된 2차 TV토론이 기다려지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