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48] 누가 가장 정직한 후보일까요?
시민의 자유의지에 따라 대표를 뽑는 행위인 선거는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를 두는 유권자의 합리적 의사표현수단입니다. 대표를 시민합의로 임명하는 동시에 민의를 집약해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또 정치적 자유를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민주정치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선거제도가 정말로 시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느냐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라이커(W. H. Riker)는 투표절차가 절차적 공정성을 갖더라도 투표자의 선호와 관계없는 자의적인 결과를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선거는 국민의사를 대변하는 데 실패하고 제한적인 대의민주주의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콜만(J. Coleman)과 피어존(J. Ferejohn)도 선거는 나쁜 독재자를 거부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라고 봅니다. 슘페터(J. Schumpeter)는 국민의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 피쪼르노(A. Pizzorno)는 개인들의 의사결정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선거의 합리성에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선거의 필요성과 효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당연한 권리를 누리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거의 합리성과 공정성에 대해서 ‘과연 그런가’ 이의가 나오는 걸까요?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이성의 제도가 아니라 감성의 제도라서 가장 좋은 후보를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민이 합리적 선택을 할 것 같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므로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표적인 비합리적 선택이 지연 혈연 학연 등을 기준으로 한 투표입니다. 또 공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진 후보를 선택하기보다는 시민을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후보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후보’보다 ‘좋은 후보라는 이미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은 겁니다. ‘좋은 후보’를 선택하는 시민이 많으면 선거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후보라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시민이 많으면 선거는 라이커나 피쪼르노의 주장을 증명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해마다 연말연시에 언론들은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등을 선정해 발표합니다. 발표 내용을 보면 좋은 책이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니고 관객이 가장 많이 본 영화가 가장 좋은 영화인 것도 아닙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와 선거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좋은 정치인이 선거에서 늘 이기는 것도 아니고 최다득표자가 가장 좋은 정치인인 것도 아닙니다.
이번 대선은 ‘역대 최고의 비호감 선거’라 불립니다. 비호감 선거니까 시민의 뜻을 합리적으로 대변하는 데 실패하게 될까요? ‘역대 최고의 비호감 선거’는 ‘나쁜 선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호감’이라는 표현이 안 쓰였고, 언론들이 독재자의 눈치를 살펴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문제가 감춰졌을 뿐 과거에도 비호감 선거, 나쁜 선거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나쁜 선거는 체육관에서 혼자 등록한 독재자를 거의 만장일치로 뽑았던 ‘거수기 투표’입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대표를 뽑을 기회를 시민에게서 빼앗았던 나쁜 선거야말로 민주주의 원리를 짓밟은 ‘비호감 선거’입니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된 박정희와 전두환은 독재자였고, 최규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했습니다.
유력 후보들에 대한 비호감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네거티브 공세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건 잘못된 해법입니다. 선거는 언제나 최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호감일지라도 출마자들 가운데 가장 좋은 후보를 선택해야 나쁜 선거가 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