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50] ‘나를 위해’ 이재명, ‘국민의’ 윤석열
선거운동은 후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후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상대 후보에게 불리하게 가공된 정보이지, 시민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후보가 시민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가 슬로건입니다.
서울의 어느 여대 앞에 ”잘 먹은 떡볶이 한 접시, 고기 열 근 안 부럽다“는 말을 써놓은 떡볶이 포장마차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산아제한 표어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 표어를 다시 ”잘 지은 슬로건 하나, 백 가지 공약 안 부럽다“고 패러디할 수도 있겠습니다.
슬로건에는 시대정신과 후보의 철학, 선거의 핵심전략 등을 담아내야 합니다. 후보의 비전과 정책을 상징적으로 간결하게 압축한 슬로건은 선거 결과에 수많은 공약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호보다 감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로건이 알기 쉬워야 하고, 간결해야 하고, 특히 진정성이 느껴져야 합니다.
좋은 슬로건의 대표적인 사례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부패 등 실정을 담은 이 슬로건의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고 했지만 ‘갈아보자’는 분위기를 막지 못했습니다.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 중 사망하지 않았다면 정권이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2012년 제18대 대선 때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도 아주 좋은 슬로건으로 꼽힙니다.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양질의 일자리창출’과 ‘노동자 삶의 질 개선’에 초점을 맞춘 슬로건이었습니다. 손 후보가 경선에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문재인 후보에게 지는 바람에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본선에서는 ‘정권교체냐 정권연장이냐’는 슬로건을 추가했지만 ‘준비된 여성 대통령’과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건 박근혜 후보에게 져 정권교체에 실패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경제민주화 공약을 포기하면서 ‘내 꿈’이 ‘시민의 꿈’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박근혜의 꿈’이었다는 비아냥이 나왔습니다.
지지율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이재명 후보는 ‘나를 위해, 이재명’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이재명을 위해 이재명을 지지하지 말고 ‘나’를 위해 이재명을 응원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이재명이 유능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2030세대와 여성, 중도층 등 상대적으로 지지가 약한 시민들에게 다가가려는 슬로건입니다.
윤석열 후보의 슬로건은 ‘국민이 불러낸 대통령’과 ‘공정경제·안전사회’입니다. ”국민이 소환해서 나왔다“는 윤 후보의 대선 출마 이유를 ‘국민이 불러낸 대통령’에, 국민의힘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을 ‘공정경제·안전사회’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임시 슬로건이고 아직 공식 선거 슬로건이 없습니다. 그래선지 이 슬로건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대신 이름 앞에 붉은 색으로 ‘국민의’란 수식어를 붙인 ‘국민의 윤석열’을 씁니다.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을까요? 부산 선대위 출범식 때는 ‘부산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산의 윤석열’을 썼습니다. 국민의힘의 지역적 지지기반인 부산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냥 ‘국민’ 자리에 지역명을 넣은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기득권의 나라에서 기회의 나라로 바꾸겠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물결은 김동연 후보의 대표 슬로건인 ‘기득권 공화국을 기회의 공화국으로’를 표절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처럼 정당은 선거 슬로건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슬로건보다 더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건 슬로건 실천의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